[생명의말씀] 예수로 자유하자

등록날짜 [ 2011-03-17 14:23:23 ]

세상 끝날까지 변하지 않는 주님 사랑 알아
그의 살과 피로 주신 생명, 영원히 간직해야

고린도전서 11장 23~26절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귀에 들리지 않습니다.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우리의 감각에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격을 가지셨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요, 의로우시고, 거룩하시고, 진실하시고, 선하신 분입니다. 그는 선하시나 죄를 알고 이기시는 승리자이십니다. 하나님은 절대 죄와 함께할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의 의를 영원토록 보전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 창조한 인간은 마귀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기 전에는 하나님과 함께 행복하였습니다. 그러나 죄가 마귀 궤계를 통하여 들어오는 순간부터 인간은 하나님과 분리되었으니 곧 죄로 말미암은 저주와 멸망뿐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같이 저주와 멸망밖에는 다른 것이 전혀 없는 인간을 불쌍히 여기사 독생자를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는 죄와 저주에서 인간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이요, 죄와 저주 아래서 영육 간에 고통당해야 하는 인류의 구세주이십니다(사53:5~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하나님은 사랑이기 때문에 세상의 수많은 인간이 죄 아래서 멸망하는 것을 방관하지 아니하셨습니다. 무엇 때문에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온갖 고통을 당하다가, 죽은 후에 자기 영혼이 저 불타는 지옥에 가서 그토록 참혹하게 쉼 없는 고통을 당해야 하는지를 선지자를 통하여 율법으로 가르치셨습니다. 또 교회를 세우시고 사도들과 목사들과 전도자를 보내서 애타게 가르치십니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이토록 하나님께서 죄 아래서 멸망하는 인간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보내주시고 십자가에서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최악의 저주의 죗값을 치르기 위하여 피 흘려 죽게 하신 그 은혜를 믿고 구원받으라고 애가 터지도록 땀과 눈물로 외쳐도 듣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독교라고 하는 하나의 종교 차원에서 종교 문화로 이해하려 하는, 돌이키지 않는 무지로 도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땅 끝까지, 세상 끝 날까지 구원의 소식을 전해주려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내신 하나님의 양보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일러스트 / 박철호

멸망을 방관하지 않으시는 진실한 사랑
하나님은 전지하시고 전능하시기에 전혀 아쉬움이 없으신 분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그토록 배도하고 도전하는 인간의 멸망할 죄를 대신 담당하게 하셨을까요? 또 이 사실을 몰라 멸망하는 인간을 위해 사도들을 죽이시고, 초대 교인들을 죽이시고, 지금도 온갖 형태의 순교를 수레 삼아 그토록 복음을 전하여 한 사람도 멸망하지 않기를 원하시며 자기 독생자와 자기 종들을 잔인하게 죽이시는 것일까요?

단 하나, 인간이 그토록 하나님을 배도하고 도전하고 멸망할 죄로 지옥 가는 것이 불쌍하기 때문입니다. 인류가 다 예수 믿고 구원받기를 바라는데 그 바라는 소망대로 다 예수 믿고 구원받지 못하는 만큼 아쉽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오직 인간이 죄 아래서 멸망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시는 하나님 자신의 뜨겁고도 진실한 사랑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아쉬움을 해결하기 위해서 부지런히 주님 오실 때까지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아쉬움을 풀어주고 인간의 멸망을 해결하는 전도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말씀하십니다. 인간은 죄 아래서 저주와 질병과 가난과 온갖 고통으로 망한다고 외치십니다. 멸망하는 인간이 깨닫고 믿고 구원 받기를 소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포기할 수 없는 인간을 향한 관심사이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 인간이 사는 한, 이 땅에 불신자가 있는 한 절대 중단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의 의지인 것입니다(행1:8).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13:1).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6:38~40).

믿음으로 소유하는 생명
기독교의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깨닫게 하신 그대로 죄 아래서 멸망하는 것을 아는 것이요, 또 멸망하게 하는 죄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담당하시고 해결하셨으니 이 사실을 믿고 구원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최고 지혜와 행복은 하나님께서 인간에 들려주시는 사랑과 생명의 말씀을 깨닫는 능력과 그 생명을 소유하는 믿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죄와 저주와 지옥에서 살려내기 위하여 죄 아래서 이미 죽어버린 낮고 천한 우리 인간에게 적극적으로 다가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멸망할 죄를 해결하시고자 말씀이 육신이 되어 피 흘려 죽으시기 위하여 사람의 육체의 모양으로 오시기를 자원하셨습니다(빌2:5~8). 그러므로 인간은 누구나 마귀와 죄 아래 있으니, 속히 자기 죄를 내어놓고 예수 그리스도가 흘리신 피 공로로 깨끗이 해결해야 합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입니다(마4:4). 또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생명이 있다고 하셨으니, 세상 양식은 먹어도 죽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살과 피는 영원히 사는 생명의 말씀이요, 생명의 양식이요, 생명의 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영원히 산다고 하는 절대적 지식의 믿음을 내 몫으로 소유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요6:53~58).

사랑하는 성도여,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의 살을 찢고 피를 흘려 먹게 하여 생명을 주시기까지 진실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사도와 같이, 수많은 순교자와 같이 피 흘려 죽기까지 주를 향해 은혜 받은 자다운 정절을 지키는 것이 인격적으로 마땅한 행위가 아닐까요? 신자의 타락은 예수 그리스도가 살 찢고 피 흘려 죄와 저주와 지옥에서 구원하신 그 은혜를 서서히 잊어버리면서부터 시작합니다. 바로 감사의 감각을 잃은 그것입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이지만 자신이 죄인인지도, 멸망할 자인지도,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당할 자인지도 전혀 모른 채 태어납니다. 그러나 천만다행으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인이요 멸망할 인간임을 알게 되었고, 우리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살 찢고 피 흘려서 구원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고 구원 받았으니, 평생 사는 동안에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며 감사함으로 살아야 합니다.

변하는 것은 가치가 없습니다. 변하지 않는 것만이 가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변치 않는 한, 우리의 믿음도 영원히 변치 말아야 합니다. 나 같은 죄인 위해서 살과 피를 영원한 생명의 양식으로 주신 그 은혜에 감사하며 하나님의 은혜로 진하게 돌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죄와 저주와 지옥에서 자유해야 합니다.

위 글은 교회신문 <233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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