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말씀] 예수 증거에 생애를 바친 사람 바울

등록날짜 [ 2015-11-11 15:51:14 ]

어떤 핍박에도 절대 굴하지 않고 복음을 증거했으니
우리도 예수를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반드시 전해야


고린도전서 9장 16~19절
“내가 복음을 전할찌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내가 내 임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임의로 아니한다 할찌라도 나는 직분을 맡았노라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인하여 내게 있는 권을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라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은 죄로 영원히 멸망할 인류를 사랑하시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사 십자가를 지게 하심으로 인류의 죄를 대속하여 주셨습니다. 십자가는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구원받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지혜요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것이 죄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는데, 이 은혜를 알지 못하고 감사하며 살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셔서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우리 죄를 대신 갚아 줬는데도 이 사실을 믿지 못하고 지옥 가는 것이 죄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을 수 있는 시간은 충분한데, 그 시간을 놓쳐서 죄를 해결하지 못하고 지옥 간다면 이보다 불행한 일은 없습니다.

예수께서 이천 년 전에 가야바의 뜰에서 우리 대신 모진 매를 맞으셨습니다. 우리 대신 모질게 가시관에 찔리시고, 우리 허물을 대신하여 징계를 받으셨습니다. 우리 대신 저주의 나무에 달려서 저주를 담당하시고, 우리가 죽을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믿고 천국 가면 됩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5~6)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비밀을 알지 못한 채 멸망으로 질주하는 인류에게 십자가의 오해를 풀어 주고자 자신의 생애를 아낌없이 예수 증거에 바친 사랑의 사도입니다. 바울 서신들은 실제 복음 전도를 하면서 체험한 사건들을 기록한 책입니다.

전도자로서 바울의 삶은 감히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위대합니다.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살 수 있을까 생각할 정도로 엄청나고 위대해서 그의 삶을 말하는 일조차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 바울이 수많은 핍박과 죽음의 위협 속에서도 전도자로서 위대한 삶을 산 것은 바울 개인의 힘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힘과 능력을 주셨기에 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의 핍박을 피해 디아스포라(Diaspora)를 찾아다니면서 전도했습니다. 디아스포라는 유대왕국이 패망하여 바빌로니아로 유배당한 뒤 이방인들 사이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들, 혹은 유대인 공동체를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전하는 자가 있으면 아무리 먼 곳에 있는 디아스포라라도 악착같이 찾아가서 핍박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전도한다고 옥에 가두거나 죽이지 않는데도 아무리 전도하자고 해도 실행하지 않으니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주님 앞에 가는 날 전도하지 않은 심판을 어찌 받으려 하는지 두렵기만 합니다.


예수를 핍박했으나 복음을 전하게 된 바울
바울은 평생 매 맞고 옥에 갇히는 위험을 무릅쓰면서 전도했습니다. 동족들에게 받는 핍박이 심히 괴로우나 낙심치 않았으며, “겉 사람은 후패하나 속은 날로 새롭도다”라고 고백하며 전도했습니다(고후4:16).

터키에는 바울이 전도한 소아시아 교회들이 있습니다. 자동차를 타고 가기에도 힘든 산악 지대에 바울이 세운 교회의 흔적이 있고, 핍박받은 흔적이 생생히 남아 있습니다. 바울은 처음엔 복음을 증거하러 아시아로 가려 하였으나 유럽인들이 어서 와서 복음 전해 주기를 간청하는 환상을 본 후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전도지를 유럽으로 바꿨습니다.

바울은 성령이 인도하시면 자기의 계획을 완전히 포기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의 삶은 성령이 인도하시는 삶이요, 성령에 압도당한 삶이요, 그렇기에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위대한 삶이었습니다.

만약 바울이 예수를 믿고 나서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면 아무도 그를 핍박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전하지 않으면 화가 미친다고 말하며 결사적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일러스트 / 노혜지

“내가 복음을 전할찌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고전9:16).

바울도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나기 전까지는 예수를 핍박하던 사람 중 하나였습니다. 나사렛 목수의 아들이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자 유대인의 왕이라고 말했으니, 유대인의 수치요, 민족적 반역이요, 하나님께는 신성 모독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이 마땅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난 이후 바울의 가슴은 불타올랐습니다. 자신처럼 예수를 오해하는 유대인들에게 예수에 대한 오해를 풀어 주려고 디아스포라마다 찾아가 예수를 전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런 바울을 엄청나게 핍박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동족의 핍박에 조금도 굴하지 않고 복음 증거에 생애를 바쳤습니다. 예수를 몰랐을 때는 동족과 똑같이 예수를 핍박했으나 예수를 알고 난 후에는 그것이 죽을 짓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그립바 왕에게 신문받을 때에도 담대히 예수를 증거하였고, 베스도가 소리치며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행26:24)라고 할 때도 개의치 않았으며, 아그립바 왕을 향해 “당신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행26:29)라고 외쳤습니다.


예수에 대한 오해를 풀어 주는 복음 전도
우리도 예수를 알되 바울처럼 미칠 정도로 알아야 합니다. 바울은 과거의 자신과 똑같이 예수를 오해하는 유대인들을 설득해서 예수에 대한 오해를 벗겨 주는 일에 미쳤습니다.

만약 도둑 누명을 쓰고 뭇사람에게 붙들린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내가 그 사람의 결백을 알기에 “이 사람은 도둑질한 사실이 없습니다. 내가 증인입니다. 이 사람은 나와 함께 있었습니다”라고 변호할 때, 사람들이 오히려 내게 돌팔매질을 하며 “왜 도둑놈 편을 드느냐?”고 한다면 이 얼마나 답답한 일이겠습니까?

이때 나의 위기를 모면하려고 무고한 사람이 법정에 끌려가서 징역을 선고받고 형벌을 당하게 내버려둘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끝까지 그가 도둑이 아니라고 변호해 주어야 합니다.

이런 일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나게 큰일이 예수를 잘못 아는 오해를 어떻게 풀어 줄지 고민하는 일입니다. 바울은 바로 그 일에 미쳤습니다.

“나도 너희처럼 예수를 모질게 핍박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옥에 가두고 죽일 때에 가표를 던질 만큼 앞장서서 핍박했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나고 보니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너희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아라.”

그러나 아무리 말해도 믿지 않으니 얼마나 답답한 일입니까.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그분의 누명을 어찌 모른 척할 수 있을까요? 예수를 알지 못하는 사람을 볼 때 답답한 심정이 밀려 나와야 예수를 전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속에 이런 답답함이 있습니까?

예수 믿으라고 하면 다른 종교를 믿는다고, 종교는 다 같은 것이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떻게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같습니까? 어떻게 예수가 공자나 석가나 소크라테스와 같습니까? 그들은 사람의 자식이요 피조물이지만,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조물주이십니다.

우리 인간은 모두 죄인이었으나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시고 의롭게 했다고 말해 주어야 합니다. 예수를 오해하는 자들 앞에서 예수를 바르게 변호하고 예수가 어떤 분인지 말해 주어야 합니다. 속에서 이런 마음이 불타지 않는다면 하나님 앞에 의리 없는 인간입니다.

예수를 모르고 오해하는 사람들 앞에서 예수에 대한 오해를 풀어 줄 때 얼마나 주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우리가 예수 편에 선다는 것은 목적 없이 서는 것이 아닙니다. 속에서 거룩한 울분이 솟아나야 전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위 글은 교회신문 <458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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