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말씀] 부모님의 심정을 통하라

등록날짜 [ 2016-05-16 13:27:46 ]

예수는 아버지의 뜻을 위해 기꺼이 목숨도 내놓았듯이
자녀라면 반드시 주 안에서 부모에게 순종해야 마땅해

에베소서 6장 1~4절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하나님은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시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지구상에서 부모를 말하고 자녀를 말하고 인생의 생사를 논하는 책은 성경밖에 없습니다. 과거도 그랬고 지금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렇게 되어 가는 책이 성경입니다.

예수께서 먼저 보이신 순종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를 구원할 뜻을 정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심정에 도달하여 십자가에 피 흘려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본을 보이셨습니다. 이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순종을 보이신 일은 우리에게도 자기와 같이 순종하라 가르치신 것입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처음 만드신 창조주요 조물주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흙으로 사람을 만들고 또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2:7).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3:19).

사람이 죽으면 ‘돌아갔다’고 말합니다. 육체는 하나님께서 흙으로 만들었으니 흙으로 돌아가고, 내 속에 있는 사는 영은 하나님께서 왔으니 하나님께로 가야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로 갈 수 없다면 어디로 가야 할까요? 사람이 70년, 80년을 살고 죽는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뜻입니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90:10).

하나님은 아담을 만드시고, 아담이 독처하는 것을 보시고는 그의 갈비와 살을 취하여 여자를 만드셨습니다(창2:18, 20~23). 그래서 부부는 남이 아니라 한 몸, 즉 일신이라고 합니다.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찌니라 하시니”(마19:6)라고 했습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대로 남녀가 만나 결혼을 합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하여 자기 몸을 주심같이 하라”(엡5:25).

아내는 남편에게 사랑받을 존재입니다. 여자는 사랑받도록 되어 있고 남편이 사랑해 주는 만큼 남편에게 복종하게 되어 있습니다. 천만 원을 빚진 자를 대신해서 천만 원을 갚아 주면 그가 빚쟁이에게서 자유로워지듯이, 내가 지옥 갈 죄를 예수께서 대신 갚아 주셨기에 그 사실을 믿으면 우리는 죄에서 벗어나 구원받고 천국 가게 됩니다. 이렇게 남편이 아내를 사랑해야 합니다.

아내에게 무슨 죄가 있으면 남편이 책임져야 됩니다. 이혼할 대상이 아니라 여자는 사랑할 대상입니다. 아내에게 무슨 잘못이 있어도 책임지고 사랑하면, 아내는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남편에게 복종하게 되어 있습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는 것은 순교 정신을 말합니다. 부부간에 이런 관계가 되면 절대로 나눌 수 없습니다.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고 했으니, 이렇게 부부가 영적으로 육적으로 사랑하면 이 가정은 행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남편과 아내는 믿음과 관심 안에서 책임지는 사랑이 여물어 갈 때 행복할 수 있습니다.

자식을 향한 부모의 마음
부모는 자녀를 양육하는 일에 책임자요 주관자이며, 거역할 수 없는 어른입니다. 사람이 자식을 낳는 것은 동물적 존재와 같이 성적인 욕구 충족에서 자식을 생산하는 것이 아닙니다. 남자와 여자를 만들고 “생육하고 번성하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자녀가 생산됩니다. 부모들은 자식을 낳을 때 죽을 만큼 고통스럽고 힘든 경험을 합니다. 또 키울 때는 그보다 더 힘겹고 고통스럽게 인생을 다 바쳐 가며 뒷바라지를 합니다.

그런데도 자식들은 부모에게 거짓말하고, 속이고, 부모님 주머니에서 돈도 훔칩니다. 부모는 그런 사실을 다 알면서도 자식이기에 모두 품고 기다리며 키웁니다. 자식은 결혼할 때까지도 부모의 심정을 모릅니다. 부모는 자식 잘되는 일에 인생을 쏟아붓습니다. 뻔히 사라지는 인생인 줄 알면서도 그렇게 합니다.

자식이 부모에게 자기 생애를 다 드린들 부모의 은혜를 갚을 수 있을까요? 목숨을 투자해서 키운 자식인데, 부모에게 반말하며 쉽게 무시합니다. 부모에게 받은 은혜는 계산할 줄 모르고, 자신들이 부모에게 해 준 것만 계산합니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는데 그 은혜를 모릅니다. 자식들이 부모의 은혜로 살고 있으나 부모를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것이 죄입니다. 세상에서도 죄를 지으면 죗값으로 처벌받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으면 이 땅에서는 내버려두지만 목숨이 끝난 다음에는 저 불타는 지옥에 가서 영원히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그 지옥은 한 번 들어가면 절대 나올 수 없고, 고통을 견디려야 견딜 수가 없는 곳입니다.

유황 불 못에 던져져 밤낮 세세토록 괴로움을 받는다고 말했습니다(계20:10).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신 것이 사실이요, 남자와 여자를 만든 것이 사실이요, 인간의 삶이 몇 년 산다고 한 것도 사실이요, 죽은 다음에 육체가 흙으로 돌아가는 것도 사실이라면 이 말씀도 사실이라는 데 동의해야 합니다. 사단은 자기 위에 계신 주관자를 부인했습니다. 그의 멸망은 영원합니다.

불효자의 부모는 낙이 없고 미련한 자식은 부모의 한(恨) 많은 근심이 된다고 했습니다. 또 불효자는 그 부모에게 재앙이라고 했습니다.
“미련한 자를 낳는 자는 근심을 당하나니 미련한 자의 아비는 낙이 없느니라”(잠17:21).

“미련한 아들은 그 아비의 근심이 되고 그 어미의 고통이 되느니라”(잠17:25).

“미련한 아들은 그 아비의 재앙이요 다투는 아내는 이어 떨어지는 물방울이니라”(잠19:13).

왜 자식 때문에 부모가 이같이 재앙을 받고 한평생 낙을 잃고 살아야 합니까? 오늘날 자녀는 부모의 심정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먼저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는 것이요, 다음은 부모께 순종하는 것이니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하신 말씀은 약속 있는 첫 계명입니다(엡6:1~3).

진정한 효도와 축복
이삭은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이 자기를 번제 제물로 드리려 할 때 죽을 줄 알면서도 순종하여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입다의 딸은 순종함으로 아버지의 서원을 하나님께 갚아 드렸습니다. 자녀의 순종은 부모에게 영광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자녀에게 순종하라 하신 것은 자녀를 부모 앞에 압제하려 함이 아니요, 땅에서나 하늘에서나 복을 주려 하신 것입니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교훈하였습니다.

“너 낳은 아비에게 청종하고 네 늙은 어미를 경히 여기지 말지니라”(잠23:22).

자녀들에게 부모에게 주 안에서 순종하면 그는 땅에서도 하늘에서도 형통할 것이라고 했습니다(엡6:3).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하면 부모에게는 영화요 면류관이나 자기 자신에게는 영원한 축복이 됩니다. 부모와 하나님의 사랑받을 영광인 것입니다. 사람이 태어나서 부모의 사랑을 받는 것이 가장 큰 영광일진대, 주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영광이라면 얼마나 크겠습니까. 그러므로 자기 자신의 축복을 위해서라도 자기를 낳은 부모에게 효도를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 아들이라는 영광을 포기하고 강도와 같은 취급을 받으며 십자가라는 저주의 형틀에 못 박혀 피 흘려 죽으신 후에 부활이라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이와 같이 순종은 쓰나 그 열매는 답니다.

자녀들이여! 부모의 심정을 통하십시오. 부모의 심정을 통하는 자녀라면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아버지의 뜻을 위하여서 기꺼이 순종하는 일에 자기 목숨이라도 내어 놓아야 합니다. 이것이 효도이며 축복입니다. 눈에 보이는 부모를 무시하는 것은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무시하는 행위와도 같습니다(요일4:20). 부모를 사랑하며 죽도록 효도합시다. 입다의 무남독녀와 같이,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과 같이. 이는 계명이며 하나님의 영원한 약속입니다.

 

위 글은 교회신문 <480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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