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전 목사 지상강의 ‘산상수훈’] 긍휼은 사랑의 행동으로 나타나야 한다
윤석전 목사 지상강의 ‘산상수훈’(20)

등록날짜 [ 2013-08-20 17:19:13 ]

죄로 인해 멸망당할 죄인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구체적인 실천으로 영혼 살리려는 사랑 넘쳐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마태복음 5장에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시고, 바로 이어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하셨습니다.

‘긍휼(矜恤)’은 헬라어로 ‘엘레오스’라는 말로서 ‘자비’라는 뜻을 지닙니다. ‘사랑’, ‘동정’, ‘불쌍히 여김’이란 뜻도 포함합니다. 한마디로 ‘긍휼’은 불쌍하게 여기는 일과 사랑하는 일을 합친 말입니다. ‘긍휼’은 단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의 감정이나 성품으로 드러나는 동정심으로 끝나지 않고, 구체적인 사랑의 행동으로 나타내는 일을 말합니다. 그러기에 ‘긍휼히 여기라’는 말씀은 ‘사랑을 행동으로 나타내라’는 명령입니다.

행함으로 나타내야 할 긍휼
불쌍한 사람을 볼 때, 그저 ‘불쌍하구나!’ 하고 애처로운 마음만 먹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가 ‘불쌍하구나!’ 하는 마음만 먹지, 행동으로 긍휼을 베풀며 사랑을 실천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서는 말합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2:14~17).

세상에서는 ‘불쌍하다’는 마음을 품는 사람을 ‘인정 많은 이’이라고 합니다. 불쌍한 자를 책임지려고 하는 사람은 ‘긍휼을 베푸는 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마음이 제일’이라고들 합니다. 물론 마음이라도 그렇게 먹어주면 좋긴 하지만, 행동이 뒤따르지 않으면 어떤 면에서는 위선(僞善)이라 하겠습니다. 마음이 제일이면 무엇합니까. 굶어가는 사람을 물끄러미 쳐다만 보면서 ‘배고파서 어쩌나, 불쌍하다’ 하고 마음만 먹으면 무엇하느냐는 말입니다. 배고픈 자에게는 음식을 먹여 배부르게 해 줘야 합니다.

우리는 인간의 애정과 감정에서 나오는 동정심을 자칫 사랑으로 오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내가 네게 불쌍히,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주었으나 너는 행동으로 사랑하지 아니하였다”라고 한다면 어찌하겠습니까? 우리는 이렇게 불쌍히,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사랑하는 행동으로 실천하지 않아도 이를 죄로 여기지 않아 문제입니다.

긍휼히 여기지 않은 자가 받을 심판
누가복음 16장에 등장하는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를 봅시다. 성경은 거지 나사로가 부잣집 문 앞에 누워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얻어먹었다고 했습니다. 반면에 부자는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잔치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거지는 죽자 천사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 곧 낙원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음부에 들어가서 절규했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그때 아브라함이 뭐라고 했습니까?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하나님께서는 부자에게 세상에 있을 때 거지 나사로를 왜 긍휼히 여기지 않았느냐, 왜 불쌍히 여기지 않았느냐고 책망하십니다. “네가 거지 나사로를 긍휼히 여겼다면 그가 너희 집 문 앞에서 거지로 얻어먹지 않았으리라”는 말씀입니다. “네 집 문 앞에서 늘 얻어먹던 거지 나사로에게 너는 어떤 동정과 사랑을 실천했느냐? 네가 세상에 있을 때 긍휼히 여기지 않았기에 나도 너를 긍휼히 여기지 않는다”는 심판의 말씀입니다. 이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과거의 죄를 묻지 않는 것이 긍휼
‘긍휼’은 과거를 묻지 않고 지금을 보고 사랑하는 마음과 행동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 인간들을 사랑하실 때 과거의 죄악을 묻지 않으시기에 우리가 그분께 사랑받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의 과거 죄를 캐어내시면 누구도 구원받지 못하고 멸망하고 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사랑하셨기에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 심정으로 긍휼히 여기는 자는 절대로 남의 죄를 들추지 않습니다. 죄를 들추거나 캐내서는 절대 긍휼히 여기지 못합니다. 그 죄로 계속 잘못을 벌이면, 그를 붙들고 야단쳐서라도 잘못을 알려주고 그 잘못을 고쳐주어야 긍휼을 베푸는 일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긍휼을 사랑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냥 죄로 불의한 채 죽게 내버려둬서는 안 됩니다. 사람에게 가장 잔인한 짓이 바로 무관심입니다. 당장 상대가 듣기 싫어하고 받아들이기 어려워할 만한 권면일지라도, 그 사람을 진정으로 긍휼히 여기고 사랑한다면 옳은 말을 해주어야 합니다. 긍휼은 책임져야 할 사람에게 사랑을 베푸는 일입니다. 하나님께는 인간이 바로 사랑하고 책임져야 할 자녀이기에 긍휼을 베푸시니 그것이 곧 사랑의 징계입니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히12:6).

우리는 이런 긍휼을 감사로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합니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350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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