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전 목사 지상강의 ‘산상수훈’] 인간을 긍휼히 여긴 결과가 바로 구원이다
윤석전 목사 지상강의 ‘산상수훈’(22)

등록날짜 [ 2013-09-03 11:16:13 ]

하나님 사랑의 결정체가 바로 예수 십자가 사건
우리를 자녀 삼으셨기에 죄를 엄하게 다루는 것

하나님과 우리가 아무 관계가 없다면 우리를 긍휼히 여기실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형상의 모양대로 우리 인간을 지으셨으니 우리가 죄로 멸망하는 모습을 보지 않으려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게 하셔서 인간의 죗값을 갚으셨습니다. 또 성령을 보내 주시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하시고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습니다.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4:6~7).

아들 예수의 피로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하신 일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긍휼히 여기신 놀라운 결과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버지가 된다는 것은 우리 죄악을 기억하지 않고 사랑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긍휼히 여김을 받아야 할 처지에 놓인 점을 아시고, 우리를 긍휼히 여기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 삼으시고 아버지가 되신 것입니다.

자녀는 부모에게서 무조건 용서받습니다. 부모는 자녀가 아무리 큰 죄를 지어도, 당장은 엄하게 야단을 치지만 시간이 가면 그 죄를 잊어 버립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아들의 피로 구원하시고 자녀 삼으셨으니 우리 죄를 더 는 기억지 않으십니다.

아버지 사랑을 모르는 탕자
누가복음 15장에 등장하는 탕자는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고 집을 나간 불효자입니다. 아버지는 제발 나가지 말라고 애원했는데도 탕자는 아버지의 사랑을 뿌리치고 자기 분깃을 챙겨 먼 타국으로 가 버렸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긍휼히 여기기에 매일 매일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탕자는 가지고 간 재산을 모두 탕진하자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고자 했습니다. 그때까지도 탕자는 아버지의 깊은 사랑을 몰랐습니다. ‘아버지 집에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득죄했으니 돌아가서 아버지라고 부르진 못하겠지만 종노릇 하면 양식이라도 얻어먹을 수 있지 않겠는가?’라고 생각할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에게는 집을 떠난 탕자라도 예전이나 지금이나 동일한 자기 자식입니다.

그래서 탕자가 돌아오자마자 아버지는 종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며 즐거워했습니다. 탕자는 아버지의 변함없는 사랑 덕분에 자녀로서 예전과 동일한 위치, 동일한 부유, 동일한 생명, 동일한 자유를 얻었습니다.

탕자의 비유를 통해서, 우리도 어떤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그분께 사랑받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 사랑을 받을 자격은 자녀라는 이유 때문입니다.

사랑받을 줄 아는 자
그때 큰아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아버지여! 아버지의 재산을 그토록 탕진한 녀석에게는 소를 잡고 잔치를 벌이면서 나는 여태 집에서 아버지를 섬겼는데 염소새끼 한 마리 잡아서 내 친구와 함께 먹게 한 적이 있습니까?” 큰아들 역시 아버지 심정을 모르는 또 다른 탕자였던 것입니다.

여러 해 동안 헐벗고 굶주려 돼지 쥐엄 열매를 먹던 자식이 돌아왔으니 이는 죽었다가 살아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돌아온 자식을 보고 기뻐하는 아버지의 심정을 큰아들은 알지 못했으니 그 역시 탕자라는 말입니다. 나간 자식은 말할 바 아니고, 집 안에 있던 자식도 아버지 사랑을 받고서도 모르기에 탕자입니다.

교회에서도, 교회를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 성도를 보면 목사는 더 마음이 쓰입니다. 그래서 등을 두드려 주며 사랑해 주면 옆에 있는 성도들이 불평불만합니다. “목사님은 밤낮 곁에 있으면서 속도 안 썩이고 열심히 충성하는 우리는 알아 주지 않고 실컷 속 썩이다 들어온 사람은 저렇게 사랑해 주신다니까”라고 말입니다. 이는 탕자의 근성입니다.

큰자식은 밤낮 아버지 집에 있으면서 사랑받았습니다. 하지만 나갔다 들어온 자식에게는 그동안 사랑을 주지 못했기에 아비 가슴에 응어리가 져서 사랑해 주어야 합니다. 모두 다 아버지 사랑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집에 있는 큰자식도 아버지 사랑을 받아야 살고 집 나간 자식도 아버지 사랑을 받아야 삽니다. 그래서 사랑을 베풀 때 받을 줄 아는 자가 ‘긍휼히 여김을 받는 자’입니다.

긍휼이 있는 사랑을 하라
주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자기 몸을 갈기갈기 찢어 십자가에 매달고 “내 살을 받아먹어라 내 피를 받아 마셔라” 하실 정도로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랑을 받아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랑을 받고도 아무런 감정이 없다면 불쌍한 자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라는 말씀처럼 우리는 불쌍히 여기는 것으로 끝내지 말고 긍휼함으로 사랑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만 갖는다면 이는 하나님을 기만하고, 자신을 기만하고, 상대방을 기만하는 일입니다. 주님의 긍휼이 담긴 사랑만이 영혼을 살립니다. 우리는 이 긍휼을 가지고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복입니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352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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