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전 목사가 전하는 디모데후서 3장 강해(11)] 자긍하지 말고 주님 은혜로 살아야 한다
‘마지막 때는 이러하니’(11)

등록날짜 [ 2014-02-25 09:10:40 ]

자기 생각대로 행해 놓고도 주님 뜻이라 변명치 말고
쓸데없는 자랑에 현혹되지 말고 겸손히 주님 따라야

우리는 무슨 일이 벌어질 때 주님 뜻과는 상관없이 자기 형편대로 처리할 때가 있습니다. 이것도 ‘자긍하는(자기 스스로 긍지를 느끼는)’ 행위에 해당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다’며 스스로 한계를 정해 놓고 자신을 변명하는 일도 ‘자긍’입니다. 우리는 주님 뜻을 벗어나는 일은 아예 생각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 뜻 앞에 겸손해야 합니다. 자긍하면 주님 은혜로 살려는 마음이 없어집니다.

어떤 사람이 기도응답으로 얻는 영적 만족과 기쁨은 제쳐 두고 “내가 이래 봬도 밤새도록 기도한 사람이야!”라며 스스로 만족하고 기뻐한다면, 이 또한 ‘자긍’입니다. 우리는 무슨 일이든 내가 뭘 했다고 자랑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고 주님이 할 힘을 주셨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영혼의 때를 준비하는 사람으로
지난날을 돌아볼 때 “이만하면 됐어, 난 인생에 아무런 후회가 없어”라고 말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후회가 없으신 분입니다(민23:19). 하나님만이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기까지 죗값을 대신 갚아 주고 구원해 주실 만큼, 후회 없이 인간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도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이 세상에 가득한 까닭은 인간이 그분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아서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우리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라는 사실을 명백히 알게 됩니다. 천국 문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공로로만 열리니까요.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하지 않으면 아무도 천국에 갈 수 없기에 영원토록 예수의 피 공로만 찬양하는 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자라면 이 땅에 있는 동안 항상 주의 일이 자기 손에서 끊이지 않게 해야 합니다.

또 항상 주의 일에 파묻혀 사는 상황을 기뻐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주의 일에 조금만 게으름 피워도, 육신의 욕구에 치우쳐도 ‘이래서는 안 되는데...’라고 자신을 다그치고, 제한이 있는 육신의 때를 제한 없는 영혼의 때를 준비하는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주님 다시 오실 때에 영광스럽게 들림받을 수 있습니다.

신부는 자긍하지 않는다
자긍하여 주님을 못 만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으려면 주님의 재림을 사모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베드로도, 바울도 주님의 재림을 고대했습니다. 신약성경에는 주님을 기다리는 초대교인들의 마음이 잘 드러납니다.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은 절대 자긍하지 않습니다. 들림받을 자격은 주님이 제시하시는 기준으로 결정됩니다.

교회에 가서 앉아 있기만 하면 누구든지 주님 오실 때 들림받는다고 오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열 처녀 비유를 보면, 신랑을 기다린 열 처녀 중 다섯만 혼인 잔치에 참여했습니다(마25:1~13). 신랑을 만나지 못한 다섯 처녀도 자긍한 자입니다. 혼례 절차상 신부는 등불을 들고 신랑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데, 그러지 않았습니다. 신랑이 올 때까지 등불을 밝힐 기름이 충분한지도 점검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정도면 되겠지’라고 제멋대로 자긍하며 게으름을 피웠습니다.

유대인의 결혼풍습을 보면, 신랑이 신부를 데리러 오는 시간은 초저녁부터 그 밤이 새기 전까지입니다. 신랑이 언제 올지 아무도 모릅니다. 초저녁에 들이닥치기도 하고, 날이 새기 직전 느지막이 오기도 합니다. 신랑이 왔는데도 신부가 맞이할 채비를 하고 있지 않으면 데려가지 않습니다. 신랑 따라 혼인 잔치에 가려면 자격을 갖춰야 합니다. 내 생각과 기준으로 아무리 자긍하며 기다려도, 신부의 자격에 미달하면 혼인 잔치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자격을 갖춘 자가 되라
우리는 오해하지 말고 신부의 자격을 갖추어야 합니다. 신랑 신부가 혼인 잔치에 들어가면 혼인집 문이 닫힙니다. 그 혼인집 문 밖은 어떤 장소입니까? 어떤 대우를 받는 곳입니까? 신랑은 혼인 잔치에 데리고 간 신부 외에는 아무도 책임지지 않습니다. “이 정도면 되겠지. 등불 안 켰다고 나를 내버려두겠어?”라며 오해하면, 처참한 최후를 맞이합니다. 버림받은 다섯 처녀는 어떻게 해야 데려간다는 법을 임의로 파기했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정한 법을 임의로 파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긍하는 자는 ‘뭐 이 정도면 되겠지’라며 법을 지키지 않지만, 겸손한 자는 법 안에서 행동합니다. 자신의 한계에 자기를 가두지 않고, 주님이 정하신 법을 준행합니다. 믿음도, 충성도, 전도도, 감사도 내가 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이 정해 주신 대로 따라야 합니다. 주님 뜻대로 못 살아서 애타야 합니다. 그와 반대로 주님 뜻대로 살기가 괴로워서는 안 됩니다.

쓸데없는 자긍을 버리라
자기가 믿음의 한계를 정하면, 그 선을 넘기가 괴롭습니다. 심지에 기름이 올라야 등잔이 계속 켜 있습니다. 주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맘을 항상 불태우고 신랑을 간절히 기다려야 합니다. ‘주님이 재림하든 말든 나는 바쁘고 힘들어. 이렇게 한다고 설마 주님이 나를 버리겠어?’라고 배짱부리면 안 됩니다. 쓸데없는 자긍을 버리고, 주님이 원하시는 분량에 이르러야 합니다.

바울은 고백했습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전9:27). 이 말은 절대 자긍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회심한 이후 단 한 번도 자긍하지 않았습니다. ‘주님 일에 이 정도면 됐지’라고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사역을 마무리할 무렵에는, ‘만삭 되지 못하여 태어난 칠삭둥이와 같은 자’,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고 자신을 낮췄습니다(고전15:8~9). 언제나 자신이 부족하다고 생각했기에 주님 은혜로 살려 했습니다. 우리도 사도 바울처럼 자긍하지 말고 겸손히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374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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