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전 목사가 전하는 디모데후서 3장 강해(23)] 겉과 속이 다른 외식을 버려야
‘마지막 때는 이러하니’(23)

등록날짜 [ 2014-05-20 10:58:53 ]

죄를 덮고 숨기려는 회칠한 무덤 같은 습관 버리고
행동과 생각이 다른 이중성 벗어나 성령의 사람으로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딤후3:1~2)

사도 바울은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올 때에 사람들이 거룩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경고하였습니다. ‘거룩함’은 하나님에게만 있는 성품입니다(레19:2). 오직 하나님만이 거룩하십니다. 요즘 사람들은 겉으로는 잘 꾸며 예쁘고 선하고 의롭게 보입니다. 하지만 외모를 아무리 완벽하게 꾸며도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그러니 심중에 하나님의 의가 없으면 부정하여 거룩하지 못합니다. 부정한 자에게는 그만큼 거룩하지 못한 행동이 나옵니다.

성경은 마지막 때에 죄를 돌이키지 못할 때가 온다고 했습니다.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계22:11).

말세가 되면, 악한 자에게는 다시는 회개하여 그 악함을 돌이킬 기회가 없는 최후의 날이 오고야 만다는 말입니다. 또 더러운 자는 그 더러운 죄악을 예수의 피 공로로 씻음 받지 못하여 깨끗함을 회복하지 못할 때가 온다는 말입니다.

만약 그 때 주님의 재림의 때가 불현듯 닥쳐온다면, 그는 불의하고 더러운 죄악을 가진 채로 마귀와 그의 사자를 위해 예비한 영영한 불못에 던져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지막 때일수록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일에 반대하는, 즉 거룩함에 반대하는 세상과 육신이 이끄는 생각과 이념을 버려야 합니다. 예수의 피로 불의와 더러움을 씻어 거룩해진 삶을 끝까지 지켜내야 합니다.

죄를 숨기고 거룩한 체하지 말라
아담이 마귀에게 속아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 명하신 선악과를 먹고 두려움이 엄습해 숨어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자 아담이 대답합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내가 벌거벗었으므로 부끄러워 숨었나이다.” “네가 어찌하여 내가 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먹었느냐?” “당신이 만들어준 그 여자가 먹으라고 해서 먹었습니다.” 아담은 어떻게든 하나님께 자신이 지은 죄를 숨기려고 합니다.

죄를 짓는 자는 감히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하지만 육신을 입은 인간으로서 죄를 짓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죄를 숨기고 거룩한 체한다면 이는 더욱 부정한 행위입니다. 자신이 죄인이라고 시인하고 예수 피 공로 앞에 죄를 회개하여 죄를 정리하지 않고 죄를 그대로 가지고 있다면 이는 하나님 앞에 매우 부정한 것입니다. 더러움과 부정이 자신을 지배하지 않도록 거룩함이 내 안에서 역사하게 하려면 무엇보다 먼저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예수의 피 공로로 죄를 사함받은 분량만큼 거룩함이 채워져서 성령께서 제한 없이 역사하십니다. ‘성령 충만’이라는 말은 거룩함에 압도됐다는 말입니다. 성령의 사람이란, 하나님의 거룩함에 완전히 지배된 거룩한 사람을 말합니다.

겉과 속이 다른 외식
아담이 하나님 앞에 죄를 감추었듯이 그 아들 가인도 하나님 앞에서 똑같이 죄를 감춥니다. 가인은 하나님께서 농사물로 드린 자신의 제사를 받지 않고 짐승을 잡아 피로 드린 아우 아벨의 제사만 받으시자 그만 시기 질투가 불일 듯 일어나서 자기 동생을 돌로 쳐 죽이는 살인죄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가인을 불러 물으셨습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때 가인은 죄를 토설하지 않고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이니까?”라고 거짓말하며 하나님을 속이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다 알고 부르시는데 그렇게 속여서 죄를 덮어 놓고 거룩한 체한 것입니다. 결국 가인은 저주를 받아 평생 땅에서 유리하는 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도 속으로는 죄가 가득하면서도 겉으로는 거룩한 체 외로운 체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해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마23:27~28)라고 꾸짖으셨습니다. 자신들의 죄를 감추고 겉으로만 거룩한 체하다가 결국 죄를 사해주시는 예수께로 나가지 못하고 그 죄로 영영한 지옥 불못에 빠질 것이 너무나도 뻔하기에 안타까우셨던 것입니다.

목사인 저 역시 하나님 앞에 겉과 속이 같지 못할 때 매우 괴롭습니다. ‘정말로 나는 어찌하여 겉과 속이 이다지도 같지 않을까?’ 괴로워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거룩함을 유지하지 못하고 변해가는 내 모습이 몹시도 부끄럽고 초라합니다. 그런 내 모습을 보는 날이면 거룩하심이 대대에 변함없으신 예수의 피 공로를 붙잡고 눈물로 내 죄를 회개합니다.

육신의 소욕에서 오는 갈등
하나님 뜻대로 살고 싶어도 그렇게 살지 못하도록 육신의 소욕이 온갖 방해를 부립니다. 사도 바울도 육신의 소욕을 어찌할 수 없어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롬7:21~24).
 
사람에게는 누구든지 이런 이중성이 있습니다. 이것을 얼마나 깨달아 자신에게서 끄집어내서 예수 피 공로 앞에 회개하고 다시는 과거로 돌아가지 않느냐가 관건입니다. 육신의 소욕에서 나오는 것 중 쓸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말세에는 죄가 더욱 관영하기에 이런 육신의 소욕을 이기기가 더 어렵고 더 큰 고통과 어려움을 당합니다. 그만큼 말세에는 거룩함을 지키기가 어렵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육신의 소욕을 이겨 거룩함을 지키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만큼 이를 방해하는 마귀 역사도 만만찮게 도전합니다. 마귀는 택한 자라도 삼키려고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두루 찾아 다닙니다. 말세를 당한 때에 우리는 온갖 부정한 것을 속에 두고 겉으로만 거룩한 체 하는 외식을 완전히 내버려야 합니다. 겉만 번지르르한 회칠한 무덤을 회개로 파서 싹 다 버리고 하나님의 거룩함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386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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