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례교 믿음의 사람들 <20> 존 애버내티 선교사
전쟁의 폐허에서도 교단 중흥 이뤄

등록날짜 [ 2010-03-09 09:19:08 ]

침례신학대학교 설립 기여… 교단 기틀 마련

1950년 미국의 선교회는 존 애버내티 선교사를 한국에 파송했다. 1950년 전쟁의 폐허 속에서 한국 선교에 첫발을 내디딘 에버내티 선교사는 1959년 12월 선교사를 은퇴하고 귀국할 때까지 한국 산하를 누비며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고 폐허 된 교회를 증축하는 데 힘을 다했다.

한국전쟁과 수복
애버내티 선교사가 내한하고 얼마 되지 않은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났다. 북한의 공산주의자들이 주일 새벽에 돌발적으로 남침을 시작하여 길고 긴 3년 동안의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3년 동안 밀고 밀리는 전쟁은 이 땅을 황폐화시켰다. 교회도 무사하지 못했다. 전국에 있는 많은 교회가 파괴되거나 불태워졌다. 필리핀으로 피난을 갔던 애버내티 선교사는 그곳에서도 쉬지 않고 하나님의 복음을 전했다. 마닐라에 있는 교회에서 목사로 활동하면서 한국전쟁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연합국이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하자 애버내티 선교사 부부도 1951년 4월에 다시 내한하여 충청남도 부여의 원당교회에서 개최된 교단 총회에 참석해 한국과 미국 간의 선교를 제휴하고 전쟁으로 폐허가 된 이재민들을 구호하는 의료 및 구호 사역에 발 벗고 나섰다. 의료사업을 하면서 의료선교의 중요성을 깨달은 애버내티 선교사는 부산시 남포동에 병원을 개설했다. 병원에 필요한 모든 의료기구와 의약품은 미국 남침례회 본부로부터 조달되었다.

교육사업 전개
애버내티 선교사는 한국 침례교회가 놀라운 발전 양상을 보이고 있으므로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서는 지도자의 양성이 시급하다고 판단했다. 우선 당시 교역자의 자녀를 중심으로 각 교회에서 청년들을 선발하여 학자금을 지급해 주면서 학문을 배울 기회를 만들었다. 1953년 3월 대전시 중동에 고등성경학원을 개설하여 학생 50여 명을 모집하여 신학을 가르쳤다. 1954년 4월 침례신학교로 승격시켜 문교부(현 교과부) 인가를 얻음과 동시에 초대교장으로 부임했다.

선교사 생활 마감
애버내티 선교사는 한국 선교 10년만인 1959년 12월 선교를 마치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중국 선교 30여 년과 한국에서 10여 년을 합해 40여 년간의 선교사 생활을 정리하고 본국으로 돌아간 것이다.

애버내티 선교사는 어려서부터 선교사의 꿈을 품고 신학을 공부하고 20세의 젊은 나이에 낯선 중국에서 시작한 선교를 통해 생애를 모두 주님을 위해 헌신했다. 국가적으로 가장 혼란했던 시기에 중국에 복음의 씨앗을 뿌렸고, 전쟁의 폐허 속에서 슬픔에 잠겨 있던 한국으로 파송되어 이 땅에 복음의 씨앗을 뿌렸다. 민중들의 삶 속에 희망을 일깨워준 애버내티 선교사는 우리나라 교회에 한 알의 썩어지는 밀알이 되어 놀라운 부흥의 기틀을 마련해준 고맙고 감사한 하나님의 일꾼이었다. 

자료출처 <한국침례교인물사>

위 글은 교회신문 <183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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