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콤 펜윅 한국 교회 전도기 ③] 내륙을 향해 길을 떠나다

등록날짜 [ 2010-11-24 13:01:08 ]

한국의 일상은 평온하고도 해맑아
언어 습득 위해 삶 속으로 뛰어들어

한국의 산들은 내가 그곳에 가기 직전에 나를 가로막던 난관들의 상징이 되었다. 그중에서 나를 가장 괴롭힌 산은 바로 ‘언어’였다.

다행히도 이 산은 너무 높았던 까닭에 그 뒤에 자리 잡고 있던 더 험준한 산들을 시야에서 가려 주었다. 한국에서 처음 열 달을 지내는 동안, 나는 한국어를 배우려고 각종 교과서와 지침서를 탐독했으나 별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기억력만큼은 자신이 있던 나는, 전혀 뜻 모를 글자들이 빼곡히 적혀 있는 책의 두 쪽을 반복해서 말할 수 있을 때까지 암기했으나,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면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옛날 방식의 복습으로는 실제로 한국어를 구사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든 다음부터는 모든 어학 강의, 교과서, 영어 사용권 사람들의 조언을 포기하고 다만 한국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기로 결심했다. 그러고는 몇몇 한국 친구들과 함께 황해도 소래를 향해 떠났다.

소래는 서울에서 256㎞가량 떨어진 마을이다. 충직한 한국 조랑말을 타고 서울 시내를 통과하여 소래로 가는 동안 우리는 낯선 광경들을 자주 보았다. 궁궐 문을 지키는 해태 석상 저편과 바깥 성곽 위에 세워진 망루 주변에는 흥미를 돋우는 많은 사람과 물건이 있었다. 궁궐 대문들 밖에는 하인들이 나귀들을 대기해 놓고 관리들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고, 다섯 사람이 새 성벽을 쌓기 위해 삽 한 자루를 가지고 진흙을 이기면서 협동의 힘을 과시하고 있었으며, 명절을 맞아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소년들이 조부모에게 인사하러 가고 있었다.

마침 나무꾼들의 긴 행렬이 시내로 들어오고 있었다. 소나무 가지들을 소달구지에 싣고 오는 사람들도 있었고, 조랑말에 싣고 오는 사람들도 있었고, 가난하여 짐승을 부릴 수 없어서인지 집채만 한 나뭇짐을 등에 지고 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성문을 지나 확 트인 들판으로 나가니 다양한 광경들이 눈에 들어왔다. 시골 청년들은 해맑은 표정으로 한복을 입고 있었고, 시골 여인들은 1910년대 미국 여성들의 모자보다 훨씬 더 큰 모자로 아름다운 얼굴을 가리고 다녔다. 시골 선비들은 집 앞에서 애지중지하는 곰방대를 입에 물고 만족스럽게 앉아 있었다. 들판에서는 강인하고 건실해 뵈는 일꾼들이 일손을 멈추고 서서 우리를 지켜보았고, 농부는 밭을 갈고 있었는데, 솜씨가 아주 익숙했다. 사람들은 단음 가락으로 동양의 신비로운 노래를 하면서 집단으로 벼를 추수하였다. 노동 공동체는 한국에 크나큰 유익을 끼쳤다.

그것은 화폐의 필요를 줄였고, 노동자에게 급료를 받는 것 이상으로 자부심을 심어 주었다. 남자들, 그리고 때로는 여자들까지도 집단으로 잡초를 뽑고 벼와 다른 작물을 심고, 가락에 맞춰 즐겁게 일하였다. 한국인들은 매우 부지런히 일했다. 집단으로 일하는 그들의 관습은 개척 시대 미국 농촌에서 특히 벌목 인부들 사이에 성행했던 품앗이와 비슷하다.

한국의 가을 기후는 더할 나위 없이 쾌청했다. 특히 소래로 가면서 만난 시골 풍경은 아주 인상 깊었으며, 우리 일행은 엿새 동안 257㎞나 되는 길을 아주 즐겁게 여행했다. 소래에 있는 집들은 규모가 아주 작았다. 사방 210㎝를 넘는 방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작은 집을 짓기로 했으나, 다음 봄까지 공사할 수 없어서 비좁은 방들에서 그럭저럭 겨울을 났다.

우리에게 방을 내준 안제경 선생과 서경조 선생은 서로 막역한 사이였으나, 상대방의 부인에게 말을 거는 일이 전혀 없었다. 부인들끼리도 아주 친하고 여러 해 동안 서로 집을 찾아다녔으면서도 말이다. 그곳에 와 있던 서양인 선생은 아직 한국 관습을 잘 몰랐고, 따라서 선비들에게 당신들이 만약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부인들도 선교사를 만나게 하여 서로 잘 알게 해 주어야 한다고 고집했다. 그들은 큰 반대 없이 동의했고, 그날 밤 쉰 살 남짓한 두 여자는 난생처음으로 백인 남자와 대화를 나누었을 뿐만 아니라, 자기 식구 이외 다른 한국 남자와도 대화를 나누었다. 토론토와 디트로이트에 사는 친구들이 소포로 선물을 보내온 덕분에 나는 사람들을 대접할 수 있었다. 내가 정성스럽게 만든 ‘진수성찬’을 한국 여인들이 어떻게 평가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내게도 아주 풍성했던 그 케이크를 여인들이 아주 맛있게 먹던 일은 잊을 수 없다. 저렇게 열심히 먹다가 체하지 않을까 염려할 정도였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218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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