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콤 펜윅 한국 전도기⑤] 한국 관습에 대해 조금 이해하다

등록날짜 [ 2010-12-08 10:22:46 ]

소래 생활 두 달 뒤 영어보다 한글 먼저 생각나
풍속과 법에 관한 차이 등 구별 여전히 어려워

내가 소래에서 언어를 공부한 이유는 비록 나는 영어 성경을 사용하더라도 그곳 한국인들에게는 한자 성경을 마련해주기 위해서였다. 나는 성경 장들의 수를 헤아리는 방식으로 성경 이 책과 저 책을 구분할 수 있었고, 한글 선생에게 부탁하여 영어 성경에 한글로 각 책 이름을 써넣었다. 그런 다음 각 장과 절에 해당하는 단어들을 익혔다. 숫자는 그전에 익혔다. 이런 방식으로 영한사전을 펴들고서, 이를테면 ‘속죄’라는 단어를 찾은 다음, 레위기 17장 11절을 펴서 다 함께 속죄라는 주제를 공부했다. 그들의 인내와, 부피가 큰 사전, 그리고 내 작은 인내에 힘입어 마침내 속죄의 큰 비밀을 담은 다음 절을 이해시킬 수 있었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한국인들은 미국인이나 영국인보다 제사가 무엇인지를 잘 이해하고 있었기에 구약의 속죄 제사를 가르치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단락별로 공부해 가면서 하나님이 속죄에 관해 하신 말씀을 익혔다. 한 주제를 마친 다음에 다른 주제를 택했다.

두 달 뒤 서울로 돌아왔을 때, 나는 나 자신이 한글로 생각하는 것을 발견하였다.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어떤 친구에게 영어로 말할 때 먼저 한글 단어를 생각하고 그것에 해당하는 영어가 무엇인지를 생각할 정도였다. 영어권에서 떠나, 자기들 말밖에 하지 않는 한국인들 틈에서 지낸 두 달이라는 짧은 기간에, 한국어의 중추가 되는 관용어가 지워지지 않을 만큼 뇌리에 뚜렷이 새겨졌다. 한국어를 익히는 두 달 동안 잠시 불편을 겪고 사람들을 제대로 만나지 못했을 뿐, 나 스스로 무슨 특별한 노력을 기울인 것도 없는데 말이다. 하지만 한국어는 여전히 어렵다.

서울로 돌아온 지 며칠 있다가 한국 최초 그리스도인이자 그들 중 최고 연장자와 대화를 나눴다. 그에게 내가 한글로 번역한 ‘봄으로써 얻는 생명’이라는 찬송을 보여 주고서 견해를 물었더니, 그는 한 절씩 꼼꼼히 읽어 가면서 “잘하셨군요”라고 말했다. 물론 소래 사람들처럼 ‘바치다(offer)’라는 단어를 보기 전까지 말이다. 그 단어를 보더니 소래 사람들처럼 금방 글에서 눈을 떼고서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하나님을 하인이라는 낮은 자리에 두다니 두려운 일”이라고 했다.

그런 뒤 소래에서와 마찬가지로 긴 변론이 있었고, 결국 이 귀한 한국인 형제에게 혹시 빌립보서 2장 6~11절의 말씀을 잊고 있는 게 아니냐고 묻고는 성경을 펴서 그 부분을 한번 읽어 보라고 했다. 그 부분을 읽은 그는 한동안 그 안에 담긴 진리를 생각하더니, “고맙소, 목자 양반” 하고 나직이 말했다. 그런 뒤 황인과 백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만나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자신을 겸허히 낮추신 일을 말하는 감격스러운 사귐의 순간이 있었다.

한참 대화를 나누는데 내게 거처를 내준 이-그는 선교사였다-의 젊은 선생이 방으로 들어왔다. 한국에서는 감춰 놓지 않은 책은 모두 공동 재산이었으므로, 그 선생은 즉시 내가 번역한 찬송을 집어 들고서 읽기 시작했다. 한 마디 평가도 없이 읽어내려 가다가, 그도 ‘바치다’라는 단어를 만났다. 그리고는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흥분하면서 분개했다. 나는 가만히 앉아서 그 한국인 형제에게 대답해 주도록 부탁했다.

신약성경은 여전히 빌립보서 2장이 펼쳐져 있었고, 연로한 형제는 그 단락을 가리키면서 “이곳을 읽어 봤는가?” 하고 말했다. 젊은이는 입을 다물고 읽더니 조용히 걸어 나갔다. 문을 열고 돌아선 그의 얼굴에는 두 줄기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처음 보았습니다” 하고 말했다. 그 말씀을 처음 읽었다는 말이었다. 그 찬송으로 이렇게 큰 체험을 한 나는 그토록 오르기에 높고 가파른 ‘관습’이라는 산을 이미 넘기 시작했다는 느낌이 가득히 밀려왔다.

한국에서는 ‘풍속’, ‘례’(원칙들과 관례), ‘법’(불문율) 세 가지 중에서 ‘법’이 가장 크다. 세 가지가 일반적이고 특수한 일들에 뒤섞여 있고, 용어들도 자주 바뀌어 쓰인다. 영어권에서는 대개 ‘관습’(custom)이라는 한 단어로 요약하는 단어들이다.

그중에서 ‘법’은 이를테면 짐꾼을 부린 뒤 지불하는 삯에서부터, 죄수를 죽이고 살리는 판결에 이르기까지 대소 간의 법 절차와 거래에 해당한다. ‘법’은 한글에서 가장 강력한 단어다. 무엇을 가리켜 나라의 ‘법’이라고 하거나 가문의 ‘법’이라고 하면 모든 논쟁은 그것으로 끝난다. “그런 법이 어디 있소?” 하거나 “그건 누구나 다 아는 ‘법’이오”라는 말들은 상대방에게 할 수 있는 가장 통렬한 말이다. 한국은 계약과 협정의 나라가 아니다. 부동산에 관한 문서들과 현금 증서들, 그리고 결혼 증서를 제외하고는 문서로 남기는 계약이 거의 없다. <계속> 『한국에 뿌려진 복음의 씨앗(말콤 펜윅 저)』에서 발췌

위 글은 교회신문 <220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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