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기독교선교교회연합회 취약계층에 쌀 700포대 전달
“이웃 영혼 주님처럼 섬기겠습니다”
등록날짜 [ 2013-01-22 11:36:56 ]
어릴 적부터 영특했으나 부정부패 심한 과거에 번번이 낙방
과거제 폐지 후 배재학당에 입학하면서 서양 문명 알게 돼
난세는 영웅을 낳는다. 휘몰아치는 풍운에 꺾이지 않는 인물들이 영웅으로 자라난다. 이승만은 1875년에 태어났다. 나라의 기운은 저물어 가고, 쓸쓸한 황혼 장터 같은 시대에, 몰락한 왕족으로 태어났다. 이승만은 세종대왕의 형 양녕대군의 16대 후손이었다. 그러나 5대조 이후로는 벼슬길이 끊겨서 왕족이면서도 가난 속에서 자라났다.
이승만의 아버지 이경선은 풍류객이었다. 이경선은 젊은 시절 과거에 낙방한 후, 아름다운 경치와 풍수를 쫓아 몇 달씩 전국을 방랑했다. 술과 친구를 좋아해서 재산을 탕진했던 인물이었다.
어머니 김해 김씨는 서당 훈장의 딸이었다. 당시 여인으로서는 드물게 글자를 익혔고 학식도 있었다. 자식을 여럿 잃고 나서 마흔이 넘어 낳은 6대 독자 이승만을 끔찍하게 아꼈다. 김씨는 삯바느질로 살림을 꾸려가며 아들의 교육에 전념했다.
이승만이 태어난 곳은 황해도 평산이지만, 두 살 때 한양으로 이사했다. 이곳저곳 옮겨 다니다가 자리 잡은 곳이 남문 밖 도동 골짜기, 그곳의 작은 초막에서 스무 살이 될 때까지 살았다. 이승만의 집은 비가 오랫동안 내리지 않을 때 기우제를 지내는 마루턱인 우수현 남쪽에 있었다. 이승만의 호 우남(雩南)은 자신이 나고 자란 우수현 남쪽을 가리킨다.
어린 이승만은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행복하게 자랐다. 그의 주변에는 헐벗고 굶주린 백성이 많았다. 이승만은 양반에다 왕족이었으면서도 가난한 이들과 벗하며 살았기에 생각과 느낌은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여섯 살 때 천자문 다 외워
이승만의 유년 시절에 대한 특별한 일화가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영특함이다. 모친에게 천자문을 배웠는데, 나이 여섯 살에 천자문을 모두 외워서 부모를 놀라게 했다. 그의 부모는 이웃 사람들을 초청해서 잔치를 베풀었다. 동네 사람들은 신동이 났다며 함께 축하했다.
또 하나는 시력을 잃을 뻔한 위기다. 여섯 살 때 천연두에 걸렸다가 회복되었는데, 그 후 양쪽 눈을 찌르는 듯한 심한 통증을 느꼈다. 빛이 눈동자에 들어올 때마다 아픔을 느꼈기에, 두터운 보자기로 눈을 덮어야 했다. 동양식 의술로는 고칠 수 없는 병이었다. 이승만의 부모는 수소문 끝에 서양 의술을 배운 일본 의사를 찾아갔다. 의사는 안약을 주며 하루에 몇 방울씩 넣으라고 당부했다. 그 지시를 그대로 따르자 불과 사흘 만에 씻은 듯이 나았다.
이것이 이승만과 서양 문명의 첫 만남이었다. 훗날 이승만은 그 의학을 낳은 문명을 향하여 한국인들의 눈을 뜨게 했다.
이승만은 퇴직한 관료였던 이근수가 세운 서당에 다녔다. 이근수는 사헌부 대사헌, 사간원 대사간 등 고위직을 지냈다. 을사늑약 후에는 조약을 무효로 하고 을사오적을 처단하라고 요구하는 항일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이근수는 이승만과 같은 전주 이씨에 양녕대군의 후손이었으며, 항렬로 따지면 이승만의 조카뻘 되는 인물이었다.
<사진설명> 이승만(오른쪽)이 18세 되던 해인 1893년에 찍은 사진. <이승만기념사업회 제공>
이승만은 부모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계속해서 과거에 응시했다. 하지만 결과는 항상 낙방이었다. 신동에서 천재로 자랐지만, 시험에는 운이 없었을까? 아니다.
이승만이 과거에 도전했던 어느 해, 응시자 15만 8578명 가운데 급제자는 겨우 5명이었다. 과히 ‘입시 지옥’이라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거기다 높은 경쟁률보다 더 심각한 것은 부정부패였다. 조선왕조 말엽, 과거 제도 자체가 썩을 대로 썩었다.
시험 답안지는 보지도 않고 덮어 버리는 일이 예사였고, 급제는 모두 시험관에게 바치는 금품으로만 팔리던 때였다.
이승만을 절망하게 했던 과거제도는 그나마도 1894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갑오경장으로 추진된 개혁으로 과거가 폐지된 것이다. 무려 천 년 세월을 유지했던 과거 제도의 폐지는 수많은 ‘예비 관료군’을 동요하게 했다. 실제로 과거 급제를 염원해 마지않았던 이승만은 과거 폐지가 “전국 방방곡곡에 묻혀 있던 야망을 품은 청년들의 가장 고귀한 꿈을 산산이 부수는 조치”라며 아쉬워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차라리 잘되었다는 마음이 들기도 했다. 임오군란, 갑신정변, 동학운동으로 이어지는 격변의 세월을 겪으며 이승만은 조선이 과거로부터 내려온 방식으로는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무언가 새로운 계기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비록 과거에 합격하지는 못했지만, 한학 공부는 그의 평생에 지울 수 없는 영향을 남겼다. 사서삼경에 능통하고 동양 역사와 한시(漢詩)에도 뛰어난 일류 수준의 동양 지식인으로 성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유학 공부는 당대 최고 수준이었다.
당시는 동양과 서양이 운명처럼 교차하던 시대였다. 시대와 운명은 동양에 정통해진 이승만의 발길을 서양으로 이끌었다.
배재학당, 운명의 갈림길
배재학당은 조선 최초 서양식 교육기관이었다.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가 1885년에 시작했을 때 학생 수는 단 2명이었다. 10년 뒤 1895년에는 학생 수가 100여 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과거를 준비하던 이승만의 동료 가운데 배재학당에 들어간 이들이 있었다. 친구들은 이승만에게 배재학당에서 공부할 것을 권유했지만, 이승만은 별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친구들의 계속된 권유로 마침내 배재학당에 발을 들여놓게 되는데, 이것이 그에게는 일생일대 엄청난 파장으로 남는다. 그 일로 이승만의 일생은 물론 이 나라 역사 전체의 흐름이 바뀌게 된다.
배재학당에 들어감으로써 이승만은 서양을 만났고, 민주주의를 만났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기독교를 만나게 된다. 배재학당은 일개 한학자나 관료로 일생을 끝마칠 뻔했던 유생 이승만을 서구 지향의 근대적 개혁가로 바꾸어 놓은 용광로가 되었다. <계속>
자료제공 | 『하나님의 기적, 대한민국 건국』(이호 목사 저)
위 글은 교회신문 <322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