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남 이승만, 그의 생애와 업적(51)] 약소국 지도자의 당당한 가르침
닉슨, 이승만에게 배우다

등록날짜 [ 2014-02-11 13:19:53 ]

현실 인식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에 크게 감복해


<사진설명> 미국 방문 중 닉슨 부통령(당시) 부부에게 영접받는 이승만 대통령(1954년). 

한국과 미국은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했으나 휴전에 임하는 견해가 달랐다. 미국은 휴전으로 전쟁이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이승만은 휴전은 글자 그대로 휴전일 뿐, 종전이 아니라는 태도를 취했다. 민족에게 평생을 바친 이승만은 조국이 분단해야 하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이승만은 미국이 지원해 군사력을 증강하여 북진 통일을 달성해야 한다고 한결같이 주장했다.

미국은 대한민국을 지원하기로 합의했지만, 지원 규모에서 팽팽하게 맞섰다. 이승만은 최소한 한국군 단독으로 북한과 맞먹을 만큼 대규모 무력 증강을 요구했다. 미국은 어차피 주한 미군이 주둔하므로, 그 정도까지 증강할 수 없다는 입장을 표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아쉬운 쪽은 미국이었다. 반공 포로 석방 사건을 보면서 미국은 이승만이 언제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는 인물이라고 확실하게 배웠다. 실제로 CIA(미국 중앙정보부)를 위시한 정보기관들은 이승만이 언제든지 단독 군사 행동을 감행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만약 또다시 한국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미국은 필연적으로 참전해야 해서 미국으로서는 큰 부담이었다.

미국은 어떻게 하든지 이승만을 막아야 했다. 이 임무를 맡아 한국을 방문한 이가 당시 부통령이자 훗날 대통령 자리에 오른 닉슨이다.

한미 동맹을 맺는 과정을 살펴보면, 이승만은 로버트슨 국무부 특사부터 시작해 덜레스 국무장관, 닉슨 부통령, 최종적으로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만나 회담했다. 회담하는 상대방의 직책이 높아지는 모습을 보며 이승만의 위상과 대한민국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953년 11월, 서울에 온 닉슨은 주한 미 대사관에서 한국과 협상을 이끌던 아서 딘을 만났다. 그는 이승만을 압박하려는 계획을 듣고 이렇게 말했다.

“이 대통령의 이빨을 뽑고 무기를 빼앗는 행동을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는 위대한 지도자입니다. 많은 사람이 상황이 좋을 때만 친구인 척하는 데 반해 이 대통령은 언제나 믿을 만한 진정한 친구입니다”

이승만을 알아주는 미국인이, 미국의 이익을 대변해야 하는 대사관에 존재했다. 이승만을 만난 닉슨은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했다. 미국은 친서에 한국군 단독 북진은 절대로 안 된다는 경고와 한편으로는 이승만이 협조한다면 미국의 지원 계획이 훨씬 순조롭게 의회를 통과하리라는 설득을 담았다.

이승만과 닉슨은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회담을 마쳤다. 20여 년이 지난 뒤, 닉슨은 회고록에서 이승만을 만난 날을 회고했다.

“나는 한국인의 용기와 인내심, 그리고 이승만의 힘과 지혜에 깊은 감동을 하고 떠났다. 공산주의자들을 상대할 때, 예측할 수 없는 작전이 중요하다고 강조한 이승만의 통찰력에 관해 많은 생각을 했다. 그 후에도 내가 여행을 하면 할수록, 그 노인의 현명함을 더욱더 높게 평가했다.”

‘공산주의자를 어떻게 상대하고, 효과적으로 제압하려 하는가’ 하는 문제를 이승만이 ‘강의’하자, 야심에 찬 마흔 살 젊은 정치가 닉슨 부통령은 잊지 못할 강한 인상을 받았다.

실제로 닉슨은 대통령 재임 기간에, 저명한 언론인이던 톰 위커가 명명한 ‘외교 정책의 불확실성 원칙’이 지닌 효율성을 적극적으로 적용했다. 한국과 인도차이나 문제를 다룰 제네바 회의를 개최하기 직전인 1954년 4월, 닉슨은 미국 기자들에게 이승만의 주장을 옹호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음모자인 동시에 미국의 지원이 없이는 승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아는 현실주의자의 모습을 지닌 복잡한 인물이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이 이 대통령의 일방적인 행동을 두려워하는 한, 그들은 제네바 회의 협상 테이블에서 그것에 따라 행동할 수밖에 없다.”

훗날 닉슨은 미국 대통령 자리에 오른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대통령직에서 불명예스럽게 사퇴했지만, 그는 오늘날 공산주의를 붕괴시킨 위대한 전략가로 평가받는다. 이른바 ‘핑퐁 외교’로 중국과 국교를 맺는 업적을 남겼다. 이를 계기로 거대한 중국을 친미(親美)로 돌려놓고 소련을 고립하게 했다. 열렬한 반공 투사로 역사를 바꾼 강대국 지도자는 약소국 지도자인 이승만의 가르침을 평생 간직했다. <계속>

자료제공 | 『하나님의 기적, 대한민국 건국』(이호 목사 저)

위 글은 교회신문 <372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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