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남 이승만, 그의 생애와 업적(13)] 미국 정치의 중심지에서 공부
조지 워싱턴 대학 시절

등록날짜 [ 2013-04-23 10:43:25 ]

굶주림 속에서도 학업과 강연 활동 병행

이승만은 한성 감옥 대학의 연장선으로 미국 대학에서 공부했다. 한성 감옥에서 노트에 자유롭게 쓴 글 가운데 ‘미국흥학신법’이 있다. 우리말로 풀면 ‘미국의 교육 진흥에 관한 새 제도’가 된다. 이승만은 이 글에서 미국의 공·사립학교 제도의 연혁과 현황을 상세히 기술해 놓았다.

또 미국의 역사, 지리, 정치 제도를 설명한 글도 있다. 아마 책을 여러 권 읽고 필요한 부분을 옮겨 적은 것으로 보인다. 내용을 읽어보면 1870년대 미국의 교육제도를 훤히 파악할 수 있다. 심지어 생계를 유지하려는 유학생들이 돈을 벌 수 있는 일거리에 관해서도 적어 놓았다.

여기에서 또 한 번, 이승만이 살아온 방식과 선견지명에 감탄하게 된다. 언제 풀려날지 모르는 기약 없는 감옥 생활 중에도 미국 유학을 꿈꾸고 철저하게 준비해 놓은 것이다.

조선 정부 특사로 미국으로 향할 때, 이승만은 민영환과 한규설이 쓴 밀서와 함께 선교사들이 작성해 준 추천서를 품고 떠났다. 미국 대학에 입학하는 데 필요하다고 생각되어 받아둔 추천서인데 무려 열아홉 통이나 되었다. 치밀하고 집요한 그의 성격을 보여준다.

선교사들은 앞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본국 정부의 훈령을 어겨 가면서 이승만을 도왔던 만큼 그에게 거는 기대가 컸다. 이미 한국에서 기독교를 전파하는 데 상당한 공을 세운 것에 더해 장차 한국을 기독교 국가로 이끌 지도자가 되리라고 예상했다. 선교사들은 미국에 있는 대학에 이승만에게 교육 기회를 줄 것을 요청하는 추천서를 기꺼이 작성해 주었다.

이승만이 처음 선택한 학교는 조지 워싱턴 대학으로, 미국의 수도 워싱턴 한복판, 백악관 바로 옆에 있었다. 워싱턴은 미국의 정치 중심지였기에 조지 워싱턴 대학은 정치 지망생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나이 서른에 대학 신입생이 되어 처음 받는 미국 교육이었지만, 이승만의 교육 수준은 교수 대부분을 능가했다.

<사진설명> 조지 워싱턴 대학 졸업장(1907년 6월 5일).

이승만은 장차 기독교 교역자가 되겠다는 의사를 표시하여 목회 장학금을 받았다. 등록금 전액을 면제받고 도서관 사용료도 한 학기에 1달러만 내는 혜택을 누렸다. 하지만 가난한 유학생인 그는 먹지 못해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강의를 듣는 일이 허다했다.

기독교에 관심이 많았던 이승만은 구약 언어학을 두 과목 수강하기도 했다. 그리고 배재학당에서 들은 수업을 인정받아 2년 반 만에 학부 과정을 마칠 수 있었다. 워싱턴에서 학교에 다니면서 미국 정치의 내막을 파악하고 정치적인 안목을 기르는 등 커다란 수확도 거두었다.

이승만은 학업과 함께 강연 활동도 벌였다. 학부 시절에는 미국의 교회와 YMCA에서 한국 선교와 독립을 주제로 강연했다. 강연한 총 횟수는 무려 170여 회에 달했다. 1907년 6월 13일 자 <워싱턴 포스트>는 이승만이 YMCA에서 강연한 내용을 ‘조용한 아침의 나라 한국’이라는 제목으로 소개했다.

“이승만은 강연에서 한국의 풍물 사진까지 동원했다. 이승만이 보여 준 100매가 넘는 사진 중에는 ‘장옷을 입고 언제나 눈을 내리깔고’ 나들이하는 중인계급 부인들의 사진도 포함되어 청중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한국의 ‘양반집 여인들’에 관한 슬라이드를 보여 주지 못하는 이유는 지체 높은 여인네들은 집 밖으로 나서지 않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연설을 마치자 청중 수백 명이 이승만에게 박수갈채를 보냈다.”

뉴저지 주 뉴어크에서 발행한 <모닝 스타>지 1907년 7월 25일 자에는 이승만을 인터뷰한 기사가 실렸다.

“아시아 전체를 집어삼키려는 일본과 러시아의 야욕은 마찬가지다. 그러나 방법에서 두 나라는 다르다. 지나친 자만으로 충만한 러시아는 러일 전쟁 기간 중 외부 비판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은 달랐다. 선량해 보일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 서양 문명이라는 양가죽으로 늑대의 본성을 위장하려고 애썼다. 결과적으로 러시아는 빈 수레가 요란한 셈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총은 조용히 적의 심장을 겨눈다. 일본에 굴복한 한국인은 아무도 없다. 강대국들은 정의의 대의를 위해 한마디도 못 하고 있다. 일본을 자극해 극동의 상업적 이해관계에 영향을 미칠 것이 보이지 않는가? 약소국들에 대한 불의로 얼룩진 평화를 영원히 지속할 수는 없다.”

강연 내용과 인터뷰 기사가 보여 주는 것처럼, 이승만은 한국을 소개하고 일본의 침략 야욕을 폭로했다. 청중은 대체로 이승만의 강연에 환호했지만, 호응도는 내용에 따라 판이하였다. 알려지지 않은 나라 조선의 신기한 이야기에는 호기심으로 귀를 기울이고, 기독교 선교에 관한 내용에서는 감동하기도 했다.

하지만 미국인이 보기에 동양의 작은 섬나라에 불과한 일본이 거대한 대륙 국가인 중국을 위협하고, 나중에는 미국까지도 위험에 빠뜨리게 될 것이라는 이승만의 주장은 웃음을 자아내는 어이없는 소리였다. 훗날 이승만의 예언적인 강연은 모두 사실로 입증되지만, 그 당시 미국인에게는 너무나 먼 이야기였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334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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