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알아야 할 믿음의 사람들] 사방으로 우겨싸여도 예수를 전한 선교사
로버트 모리슨(Robert Morrison, 1782~1834)

등록날짜 [ 2013-10-29 10:46:57 ]

청소년 시절 예수를 전혀 모르는 지역에 복음 전할 결심
20대 초반부터 중국 선교 사역에 전 생애를 쏟아부어

<사진설명> 로버트 모리슨.

1782년 1월 5일, 스코틀랜드 북부 노덤벌런드(Nothumberland) 주 모패드(Morpeth)라는 작은 읍 소재지에서 로버트 모리슨이 태어났다. 모리슨의 아버지는 장로로서 경건한 신앙생활을 하고자 노력했고, 교회와 가정에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바른 신앙인이 되고자 가족을 이끌었다.

모리슨은 8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 집에서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모리슨의 어머니는 기도하는 습관을 가르치고, 성경을 끊임없이 들려주었다. 모리슨은 외삼촌인 제임스 니콜슨이 경영하던 학교에 입학하여 초급과정을 교육받았다.

14세에 학교를 졸업한 모리슨은 아버지가 운영하던 신발 가게에서 수습공으로 일했다. 사춘기에 이른 모리슨은 잠시나마 어두운 거리를 방황했다. 그러나 무분별한 생활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16세 때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아왔다. 하나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가 흘린 십자가 보혈을 믿고 받아들이며 거듭났다.

머나먼 선교지로
모리슨은 가정 형편이 어려워서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학업을 이어 갔다. 하지만 모리슨은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 대부분을 하나님과 교제하는 기도로 채웠다. 모리슨은 인간이 죄지은 대가로 영원한 형벌인 지옥에 갈 수밖에 없지만, 예수가 쏟은 보혈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넘쳤다. 그리고 그 사실을 전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가득 차서 예수를 전혀 모르는 지역에 가서 선교하기로 마음먹었다.

19세(1801년)가 된 모리슨은 뉴캐슬 장로교회 레이들로 목사에게 라틴어, 히브리어를 배우고, 조직신학과 속기술을 공부했다. 1803년에는 고스포트(Gosport)에 있는 선교사 아카데미(The Missionary Academy)에 전입했다. 여기서 모리슨은 중국에 관한 많은 정보를 얻고, 중국에 가서 복음을 전하겠다는 마음이 생겼다. 모리슨은 죽음을 각오하고 중국에 뛰어들기로 작정했다.

1805년 23세 때, 모리슨은 런던선교회에 중국 선교 신청서를 제출했다. 이듬해 런던 선교회가 모리슨을 중국선교사로 내정하고 본격적인 선교사 훈련을 했다. 특히 대영 박물관에 있는 중국 서적들을 읽으며 현지훈련을 하고, 의학과 천문학 지식까지 교육했다. 1807년 1월 8일에 목사로 안수받고, 30일에 선교지로 향했다.

중국으로 가기 전, 미국에 들러 여러 선교 사역에 대해 정보를 입수하고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선교할 길이 조금씩 열리다
5월 12일, 모리슨을 태운 트라이던트(The Trident)호가 중국을 향해 출발했다. 113일 동안 거친 파도를 넘어, 9월 4일 금요일 마카오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모리슨을 반갑게 맞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동인도 회사 마카오 주재 대표부는 “동인도 회사 소속 상인 이외에 누구도 마카오에 머물 수 없다”고 말하며 당장 떠나라고 명령했다. 특히, 이미 마카오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로마 천주교 신부들은 모리슨을 눈엣가시처럼 여겼다.

마카오에서 쫓겨난 모리슨이 향한 곳은 중국 대외 심장부 광저우였다. 당시 중국본토에서 외국인들은 거주와 이동에 제한을 받았다. 모리슨은 중국 사람들과 접촉하는 일조차 어려웠다. 더구나 외국인에게 중국어를 가르치면 사형에 처할 정도로 서방세계를 향한 중국의 태도는 완고했다.

외국인 수용소에 갇힌 모리슨은 중국인 행세를 하며, 중국 옷을 입고 목숨을 건 채 투쟁했다. 선교지원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남은 돈으로 중국어 교사를 채용해서 어학 공부에 몰두했다. 수용소에서 나와 퀴퀴한 냄새가 진동하는 지하 셋방을 구했다. 배고픔을 참아 가며, 선교 사역이 열리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매달렸다.

한편, 동인도 회사의 관리들은 중국에 온 지 18개월이 안 된 모리슨이 만든 중국어 사전을 보고 감탄했다. 이에 중국어 번역과 통역 업무로 모리슨을 정식 직원으로 채용했다. 모리슨이 동인도 회사에 취직하던 날, 모리슨은 마카오 주재 영국 상무의 일을 보는 존 모턴의 딸 메리와 결혼했다. 열렬한 크리스천 가정에서 자란 부인은 신앙적으로도 모리슨에게 도움을 주었다.

중국 복음의 문을 최초로 열어
동인도 회사 직원으로 중국 내에 거주할 수 있는 신분보장과 약간의 경제적 보상을 받았지만, 모리슨은 본인에게 주어지는 전부를 쏟아부어 중국 선교 사역에 전념했다. 특히 중국어 성경 번역과 출판 사역을 했다. 1812년, 기독교 서적을 출판하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포고에 따라, 선교 거점을 광저우에서 말라카로 옮겼다. 특히 런던선교회에서 파송된 밀느 선교사와 함께 말라카에서, 1818년 외국인에 의한 최초의 신학문 학교인 영화학당(英華學堂)을 세워 기독교 정신을 보급하는 데 힘을 쏟았다. 영화학당은 중국인 최초 기독교 목사를 배출했다.

모리슨은 광저우, 말라카, 마카오를 왕래하며 중국인에게 복음을 전했고, 《중국어 사전》(3권, 1815~23)을 편찬했다. 1809년에 성경 번역을 시작해 1814년 출판한 중국어 신구약 성경인 ‘신천성서’가 결정적 계기를 마련해 중국에서 기독교가 깊이 뿌리내렸다.

모리슨은 중국 최초 기독교 선교사다. 사방에서 우겨싸는, 숨 쉴 수 없는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며 자신에게 맡겨 주신 선교 사명을 감당했다. 1834년, 52세라는 젊은 나이에 로버트 모리슨 목사는 마카오에서 하나님 품에 안겼다.

/정리 정한영 기자

위 글은 교회신문 <359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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