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남 이승만, 그의 생애와 업적(48)] 한반도 안전보장, 미군의 주둔
한미동맹

등록날짜 [ 2014-01-14 09:25:52 ]

각국 이해관계가 얽히고설켜 확실한 평화 조약 필요


<사진설명> 한국전선을 시찰하기 위해 내한한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자에게 태극기를 선물하고 있다(1952.12). 그러나 대통령직에 취임한 아이젠하워가 공산측과 일본에 대해 유화적인 태도를 보임으로써 두 지도자 사이에 갈등이 적지 않았다. 

6.25 전쟁에 참가한 어느 미군 병사가 이런 기록을 남겼다. “끝이 안 보이는 전쟁이다. 우리는 이길 수 없다. 그렇다고 질 수도 없다. 우리는 헤어날 수 없다.” 미군 병사가 남긴 글이 곧 미국 지도부 마음이었다.

미국은 어쩌다가 이상한 전쟁에 말려들었다. 대단치도 않은 나라를 구하려고 5만 명이 죽고 10만 명이 다치고 엄청난 물자를 쏟아부어야 하는 상황은, 빨리 빠져나가고 싶은 늪이었고 진창이었다. 이에 미국은 휴전 협정을 추진했다.

승부사 이승만은 휴전 협정에 반발해 카드 두 장을 꺼내 들었다. 첫째는 북진 통일론이었다. 이승만은 한반도 분단이 굳어질까 염려해 휴전에 강하게 반발했다. 오직 무력으로 북진하여 공산주의자들을 무너뜨리고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승만이 결사적으로 휴전을 반대했으나 메아리 없는 고독한 외침일 뿐이었다. 미국은 이승만이 꺼낸 북진 통일론을 ‘환상’이라고 일축했다. 엄밀히 따져 보면 북진 통일론은 환상에 가까웠다. 유엔군 없이 국군만으로 북진하여 중공군과 북한군을 모두 물리치고 통일을 이룬다는 생각은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이승만도 엄연한 현실을 모르지 않았다. 그런데도 북진 통일과 휴전 반대를 주장하며 범국민적 운동으로 거세게 밀고 나갔다. 나아가 이승만은 만약 휴전 협정을 체결한 후에도 중국 군대가 압록강 이남에 계속 주둔한다면, 유엔군 사령관에게 위임한 한국군 작전 지휘권을 회수하여, 국군 단독으로 끝까지 싸우리라는 결의를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통보했다.

심지어 “미국과 헤어지겠다”는 식으로 극단적인 표현을 써 가며 미국을 몰아붙였다. 이는 고도로 계산된 전략이었다. 이승만은 이처럼 비이성적인 행동을 표출해 둘째 카드인 한미 상호방위조약을 달성하고자 포석을 깔았다.

휴전 협정을 체결하고 미군이 떠난다면, 만신창이인 나라와 폐허로 변한 국토만 남는다. 그 국토 역시 휴전선만 그었을 뿐, 철책 너머에 소련과 중공은 여전히 건재했다. 만약 북한이 소련이나 중공과 연합하여 다시 전쟁을 일으킨다면, 대한민국은 속수무책으로 멸망한다. 미국이 자기 나라 젊은이들을 또다시 몇 만 명씩 죽게 할 리가 만무했다.
 
거리상으로도 문제가 발생한다. 중공과 소련은 마음만 먹으면 한달음에 대한민국으로 쳐들어올 수 있지만, 미국은 태평양을 건너는 데에 긴 시간을 소요한다. 미군이 또다시 참전할지도 미지수지만, 설령 참전한다 해도 손을 쓰기에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

따라서 이승만은 ‘휴전’이 곧 ‘한국에 대한 사형 집행장’이라고 규정했다. 아이젠하워 행정부 소속 고위 관리들에게 “한반도에 휴전 협정을 수락한다면 아무런 항의 없이 사형 선고를 받아들이는 일과 같다”고 끊임없이 강조했다.
국가 생존이 걸린 문제 앞에서, 동양의 선비요, 서양의 신사적인 풍모를 지닌 이승만은 깡패와 싸움닭으로 변했다. 한국의 안전을 보장해 달라고 집요하게 요구했다.

미국은 이 대통령이 조약 체결을 거듭 요구했으나 거절했다. 상호방위조약 대신 ‘대제제 선언’을 꺼내 이승만을 회유하려고 했다. ‘대제제 선언’은 허울뿐인 약속이 담긴 미끼였다.

“한국군을 20개 사단으로 증강하게 지원한다. 미군 대부분은 오키나와로 철수한다. 한국의 안전은 유엔 참전국 16개 국가가 공동으로 보장한다. 만약 적이 쳐들어온다면 전쟁을 한반도에 국한하지 않겠다는 내용을 공표한다.”

5월 25일,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주한 미국대사 브리그스와 유엔군 사령관 클라크를 통해 미국 입장을 이승만에게 전달하였다. 하지만 우리 민족 최초의 국제법 박사요, 미국으로부터 숱한 거절과 냉대를 받아왔고, 독립과 건국에 관해 미국의 논리를 이긴 적이 있는 이승만이 그 정도 회유에 넘어갈 리 없었다.

16개 나라가 공동으로 안전을 보장한다는 말은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했다. 과거 대한민국 건국 과정에서 유엔 여덟 개국이 위원단을 파견했다. 여덟 개국 간에도 나라마다 이해관계가 다르고 의견이 달라서 모윤숙을 활용한 미인계로 5.10 총선거를 겨우 실시했다.

마찬가지로 16개국도 이해관계가 복잡했다. 6.25 전쟁 중 영국은 미국에게 한국을 포기하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조국의 안전을 다른 나라끼리 맺은 선언이나 협정 따위에 맡길 수 없었다. 이승만이 원한 요구는 말뿐인 선언이 아니라 실제로 효력을 발휘할 수 있는 조약, 더 나아가 한국의 안전을 확실하게 보장할 수 있는 미군의 주둔을 염두에 뒀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369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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