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남 이승만, 그의 생애와 업적(49)] 혈맹 국가보다 민족을 더 사랑한 결단
반공 포로 석방 사건

등록날짜 [ 2014-01-21 09:15:14 ]

북한군 포로 중 반공주의자들을 미군 제압하면서까지 풀어줘


<사진설명> 거제 포로수용소에서 석방된 반공 포로들이 이승만 초상화와 태극기를 들고 행진하고 있다.

미국은 한국의 의사와 상관없이 휴전 회담을 진행했다. 한국 대표가 회의에 불참한 가운데 1953년 6월 8일 유엔군과 공산군 대표들은 휴전 의제 마지막 관문인 ‘포로 교환 협정’에 합의했다.

이승만은 휴전 협상에 반대하며 유엔 참전국이 결의한 대제재 선언이 “무의미하다”고 잘라서 말했다. 또 주권 국가의 대통령으로 당당하게 선포했다.

“유엔군을 모두 철수해도 좋습니다. 우리 운명은 우리가 결정하겠습니다. 우리를 도와달라고 누구한테도 요청하지 않겠습니다. 처음부터 도와달라고 요청한 일이 우리의 잘못이었습니다. 미안합니다만 현재 상황에서 나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협조를 약속해 줄 수 없습니다.”

아이젠하워에게 협조해 주지 못하겠다는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이승만은 약소국이 강대국에게 끌려갈 수밖에 없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힘과 행동을 보여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쉽게 말해서 본때를 보여주어야 했다.

전쟁 발발 3일 만에 군사력 절반을 잃어버린 나라가 무슨 수로 세계 최고인 강대국에게 본때를 보여줄 수 있을까? 함정(艦艇)이라고는 외국에서 쓰다가 버린 중고품 한 척밖에 없는 나라가, 3년간 벌인 전쟁으로 그나마 남아있던 산업 시설 80%가 파괴된 나라가, 거리에는 고아와 거지가 들끓는 나라가 말이다.

여기에서 이승만은 천재성을 발휘했다. 그는 미국이 어떻게 해서든지 휴전하고 싶어 한다는 의중을 꿰뚫어보았다. 이승만 자신도 휴전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미국이 그토록 원하는 휴전의 판을 깨버리면, 미국은 한국이 원하는 바를 들어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휴전을 깨버릴 방법, 그래서 미국에게 충격을 줄 방법, 미국 지도자들을 한국이 원하는 협상 테이블로 나오게 만들 방법, 그것은 포로 송환 문제였다.

어떤 전쟁이든 휴전 협정에서는 포로 교환 문제를 다룬다. 양쪽이 어떠한 조건으로 포로를 교환할지가 중요한 사안으로 떠오른다. 문제는 공산군 포로 가운데 공산주의자가 아닌 이들이 있었다는 점이다.

이승만이 적절하게 지적했듯, 전쟁을 일으킨 자들은 공산당 소수였지, 북한 주민은 아니었다. 강제로 끌려 나온 북한군 젊은이 중에는 공산주의가 뭔지 모르는 이가 많았다. 공산군복을 입고 싸우는 과정에서, 혹은 포로가 된 이후에, 공산주의가 지닌 악마성을 깨닫고 반공노선으로 돌아선 이들도 생겼다. 그들은 북한으로 돌아가기를 원치 않았다. 하지만 유엔군과 공산군이 포로 송환 협정을 체결하면 그들을 북한으로 돌려보내야 했다.

만약 포로 송환 협정으로 반공 포로들을 모두 북한으로 돌려보내면, 그들은 죽음 또는 죽음보다 더한 비참함을 맛봐야 했다. 실제로 스탈린은 2차 대전이 끝나고 독일군 포로로 잡혔다가 돌아온 병사들을 모두 숙청했다. 자유로운 외부 세계를 보고 돌아온 이들이 소련의 독재 체제에 반감을 표하리라 단정했기 때문이다.

나라를 위해 싸우다가 돌아온 병사들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없애 버리는 공산주의자들이, 반공노선으로 돌아선 포로들을 잔인하게 처리할 것은 자명했다. 이승만은 반공주의자들을 살리는 동시에 한국의 안전을 확보하고자, 우리를 지켜준 유엔군에게 총부리를 들이대는, 전무후무한 행동을 계획했다.

당시 포로수용소는 유엔군이 관리했다. 우리 국군은 유엔군의 지휘를 받았다. 따라서 이승만은 유엔군 관할 밖에 주둔한 헌병대를 활용했다. 원용덕 헌병 사령관에게 비밀 명령을 내렸다. 거사 직전에 반공 포로들에게 도주 경로를 알려주고 헌병대로 하여금 미군을 제압하게 했다. 우리 헌병대는 목숨을 걸고 임무를 완수했다.

1953년 6월 18일, 대한민국 헌병대는 이승만 대통령이 내린 명령에 따라 3년 동안 함께 싸워준 미군을 제압하고 반공 포로를 석방했다. 부산, 광주, 논산, 마산, 영천, 부평, 대구 등 각 포로수용소에서 반공 포로 총 2만 7389명을 석방했다.

자살을 각오하라는 대통령 명령에 충성을 다한 헌병대였기에 자살해야 할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최신 무기로 무장한 유엔군 경비병 얼굴에 고춧가루를 뿌려서 감시를 못 하게 한 한국 헌병의 작전도 기발했다. 자유를 향하여, 그리고 대한민국을 향하여, 인민 군복을 던져버린 포로들은 이승만의 대형 초상화를 받들고 행진했다.

누가 그들을 살렸는지, 누가 혈맹의 배신자가 되면서까지 동족을 구했는지, 누가 2만 7389명에게 새로운 생명을 선물했는지, 누가 약소국 지도자로서 강대국을 제압했는지, 그들은 알고 있었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370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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