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알아야 할 믿음의 사람들(14)] 일본 국회에서 신사참배 반대 외친 순교자
박관준 장로(1875~1945)

등록날짜 [ 2014-01-14 09:26:57 ]

박관준은 1875년 4월 13일, 평안북도 영변군 연주에서 태어났다. 부잣집 넷째로 태어났지만, 위로 형 세 명이 일찍 죽어 외동아들로 귀여움을 받았다. 6세가 되자 가정교사를 두고 천자문을 배웠다. 머리가 영특해서 한 달이 지나지 않아 천자문을 암기했다.

10세에는 명심보감(明心寶鑑)을 통달하고, 이어서 논어(論語), 맹자(孟子)를 독파했다. 15세 때는 시전(詩傳), 중용(中庸)을 비롯하여 주역(周易)과 병서(兵書)를 통달했고, 노장학(老莊學)과 불교경전(佛敎經典)까지 폭넓은 지식을 소유했다.

그러나 유복한 환경이 박관준을 그냥 두지 않았다. 허랑방탕한 생활로 치달았다. 이런 생활로 중병에 걸렸다. 병을 고치려고 불교와 시천교(侍天敎)에 몰입했다. 3년간 수도생활을 하는 동안 건강은 좋아졌지만, 마음의 평화는 얻지 못했다.

박관준은 동의보감(東醫寶鑑)을 연구하여 한약방(韓藥房)을 운영했다. 또 서울 세브란스병원에서 조수로 활동했다. 여기서 만난 의료 선교사에게 복음을 전해 들었다. 배운 지식, 그리고 불교와 시천교에서 그토록 간절히 구했으나 얻지 못했던 평화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자 얻게 된 것이다.

나라를 빼앗긴 백성이 인간답게 살 방법은 나라를 배신하거나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를 얻어야 했다. 특히, 일본인이 얕잡아 볼 수 없던 직업이 ‘의사’였다. 박관준은 세브란스병원 조수로 일하며 의술을 배워 1917년 조선의생(朝鮮醫生, 의사) 면허를 취득했다. 박관준은 고향 영변군으로 돌아와 병원을 열었다. 진료실에는 다음과 같은 표어를 걸었다. “나는 육신의 병을 치료함과 동시에 영혼의 병을 치료하기를 갈망한다.”

박관준은 환자들에게 예수 복음을 전하는 것이 먼저였다. 치료를 마치고 처방할 때도 기도로 마쳤다.

1935년, 박관준은 평양에 십자의원을 개설했다. 당시 한국교회는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해 시련기에 접어들었다. 일제는 각 관청 공무원과 각급 학생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전국적으로 신사참배를 강행하는 와중에 유독 기독교만이 신사참배에 불응하자 일본 국책에 반항한다는 죄를 뒤집어 씌워 검거와 불법 투옥이 이어졌다.

신사참배 반대 운동은 전국적으로 거세게 일어났다. 주기철, 손양원, 이기풍, 최봉석, 서덕명, 최상림, 주남선을 비롯하여 50여 명이 순교자의 길을 걸었고 5000여 명이 투옥되면서 순교자를 뒤따랐다.

박관준 장로도 목숨 걸고 신사참배 반대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37년, 평양에 있는 기독교 학교들이 신사참배를 거부하자 폐교 위기에 놓였다. 이에 박관준은 니시모토 평남지사와 우가끼(宇垣) 조선 총독에게 장문의 진정서를보냈다. 또 총독을 직접 만나 담판을 지으려고 13번이나 총독부를 방문했지만 모두 거절당했다.

1938년 9월 9일,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열린 장로교 제27회 총회에서는 신사참배를 가결했다. 총회가 열리기 한 달 전부터 박관준은 평양경찰서에 갇혀 있었다. 박 장로가 총회에 참석하여 신사참배에 반대하리라 여겨 미리 차단하고자 불법으로 유치장에 감금했던 것이다.

박관준은 국내에서 진행하던 신사참배 반대 운동에 한계를 느끼고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고위층에게 직접 항의하기로 했다. 1939년에 일본 국회에서 모든 종교를 일본제국 승인하에서만 가지게 한다는 ‘종교단체법’ 제정 소식을 듣고 서둘러 일본으로 떠났다. 신사참배 반대 운동의 여파로 선천 보성 여학교 교사직에서 제적당한 안이숙(『죽으면 죽으리라』 저자), 일본 신학교에서 재학 중이던 박관준의 아들 박영창과 함께였다. 전직 조선총독 우가끼, 문부대신 아라끼, 척무장관 야다 같은 고위관리를 만나 신사참배 반대의 당위성과 한국교회 입장을 설명하고 진정서를 제출했으나 그들의 마음을 돌이킬 수는 없었다.

1939년 3월 22일, 박관준, 박영창, 안이숙은 일본 국회 방청권을 구매하여 제74회 일본제국의회 때 2층 방청석에 들어갔다. 일본 국회가 사무절차를 밟아 종교 법안을 상정할 때 야스후지 의원이 단상에 오르는 순간 박관준은 미리 준비한 문서 수백 장을 아래층 의사당 안으로 던졌다.

의회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박관준을 비롯한 세 명은 체포되었고, 일본 신문이 기사화해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이유를 일본인에게 전했다. 박관준이 준비한 문서에는 일본 정부가 종교를 지배하면 하나님께서 진노하사 일본에 천재를 내릴 것이며, 국가의 존망을 좌우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과 법도를 지키면 일본이 축복받으리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한국으로 송치된 박관준은 1941년 봄, 천황에 대한 반역자로 투옥되었다.

박관준은 옥중에서도 신사참배를 반대한다는 지조를 굽히지 않고 찬송과 기도와 전도에 힘을 쏟았다.

1945년 1월 1일부터 박관준 장로는 금식 기도를 시작했다. 금식 기도 70일째가 되자 빈사 상태에 빠졌다. 일제는 긴급 병보석으로 석방했다. 평양 기독병원에 입원한 박관준 장로는 문병 온 사람들에게 “신사참배는 안 됩니다. 전심으로 예수 믿으세요”라고 권면했다.

입원 5일째 되는 아침에 박관준 장로는 “나의 책임을 다하고 하나님 아버지 품으로 돌아갑니다. 우리나라는 앞으로 이사야 11장 10~16절 말씀대로 이스라엘을 해방하듯 우리나라를 해방하실 것입니다. 끝까지 신앙을 잘 지키다가 영광스러운 하늘나라에서 만납시다”라며 낮은 음성으로 “하늘 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있으니” 찬송을 부르다 숨을 거두었다.

박관준 장로는 조국 해방을 5개월 앞두고 70세 나이로 순교하였다. 장기간 금식하는 동안 천사들이 박 장로의 입에 향기로운 과일들을 넣어 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정리 정한영 기자

위 글은 교회신문 <369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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