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남 이승만, 그의 생애와 업적(55)] 미국 원조 줄어들면서 경제 사정 나빠져
암울한 시기

등록날짜 [ 2014-03-11 09:27:15 ]

나라가 스스로 커 나가는 과도기 시절에 혼란도 커져 가고


<사진설명> 경무대에서 지방의회 대표들을 맞이하는 이승만 대통령(1957).

3선 개헌을 전후해서 이승만에게 도전할 정치 세력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국회에서는 자유당이 다수 의석을 차지했다. 이승만은 전쟁을 치르면서 군과 경찰, 관료 조직을 장악했다. 토지 개혁으로 농민을 해방하고 공산화를 막고 미국에 막대한 원조까지 받아낸 이승만은 글자 그대로 국부(國父)였다.

하지만 권력은 부패하고,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 동서고금 역사에서 나타난 자명한 진리를 이승만이라고 피해갈 수 없었다. 이승만에게 권력이 집중된 시기에, 이승만은 늙었고 자유당은 부패했다. 계속해서 문제가 곪아 갔다.

이승만 정권은 집권 초기에 관대한 언론 정책을 펼쳤다. AP통신이 한국의 언론 자유를 세계 4위나 5위 수준으로 평가할 만큼 언론이 자유롭게 활동했다. 이러한 정책하에서 언론 기관은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문맹률이 떨어지니 구독자가 늘어나 언론이 성장하는 데에 크게 일조했다. 1954년 당시 일간지 56종, 월간지 177종을 포함해 411종에 달하는 언론 기관이 활동했다. 당시 정부를 비판하던 논조가 강한 언론으로는 구(舊) 한민당 계열 <동아일보>, 가톨릭계 <경향신문>, 흥사단 계열인 <사상계>를 들 수 있다. 그들은 비교적 자유롭게 정권을 비판하는 자유를 누렸다.

그러나 정권 말기로 치닫자, 언론에 허용하던 자유도 제약을 받았다. 정권이 경직화했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사례는 언론 탄압이다. 이승만은 자신을 향한 비판을 더는 인내하지 못했고, 자유당 정권은 매사 힘으로 누르려고 했다. 1959년 마침내 <경향신문>이 폐간했다.

국회에서도 권위주의적인 경직화는 뚜렷이 나타났다. 이승만 집권 초기 제헌 국회(1948~1950년)와 말기인 4대 국회(1958~1960년)를 비교해 보면 그 차이가 확연하다.

제헌 국회 당시 이승만은 정당을 초월한 의회 리더십을 보여 주었다. 다른 견해라도 자유로운 표현을 내놓게 했고, 비판을 관용적 자세로 수용하라고 강조했다. 다수가 내린 결정이 대통령의 의지와 배치하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끊임없이 지적했다. 되도록 합의를 이루려는 진지한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4대 국회에서는 반대 의견을 힘으로 뭉개 버리려는 경향이 강했다. 따라서 의회가 갈등을 처리하는 기능이 마비됐다. 이것 역시 4.19가 발발한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종래 선행한 연구는 4.19를 정치적인 측면에서 해석하는 성격이 강했다. 자유당의 부패, 뒤이은 부정 선거로 국민이 궐기를 일으켰다고 분석했다. 물론 타당한 해석이다. 하지만 정치적인 측면 못지않게 경제적인 측면도 고려해야 한다. 먹고사는 문제가 인간에게는 가장 기본적이고 절실하기 때문이다.

그 당시 대한민국 경제는 미국 원조에 절대적으로 의존했다. 그런데 대한민국뿐 아니라 수많은 나라를 원조해야 하는 미국의 경제 사정이 언제나 좋을 수는 없었다. 미국은 경제 상황이 나빠지자 원조액을 줄였다. 한국이 직격탄을 맞았다.

1957년 3.8억 달러이던 원조는 1960년 2.4억 달러로 줄어들었다. 원조액이 37%나 감소했다. 이 당시 대한민국은 국가 재정 70%를 미국에 의존했다. 남의 나라에 의존해서 나라 살림을 꾸려 가다가 도움이 끊기니 살림이 어려워질 수밖에 없었다. 경제는 휘청거렸다. 1959년 4.8%이던 경제 성장률은 1960년 2.5%로 떨어졌다.

원조는 줄고 경제 성장률은 낮아지고 실업률은 올라갔다. 특히 대졸자 실업률이 심각했다. 이는 6.25 전쟁 기간 중 병역을 면제받고자 앞다투어 대학에 들어가는 바람에, 대학생 수가 많이 늘어난 데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인구는 늘어 가고 일자리를 만들기는 어렵고 성장률은 떨어지고 실업률은 높아지고, 참으로 암울한 시절이었다.

조갑제는 이 시대 풍경을 1950년대 영화에 등장하는 ‘룸펜(Lumpen)’으로 설명한다. 룸펜이란 배우기는 했지만 지식을 활용할 일자리가 없는 지식인들을 가리킨다. 대학은 나왔으나 실업에 처한 1950년대 청년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1950년대 흑백 영화를 보면 주인공들이 할 일 없이 담배를 자주 피운다. 농촌에 사는 부모들이 전 재산이라 할 소나 돼지를 내다 팔며 뒷바라지해서 대학까지 보냈으나, 자식들이 담배 연기나 흩날리는 룸펜이 되었으니 그 심정이 어떤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사회 곳곳에서 불만이 쌓여 갔다. 혁명의 기운은 무르익고 있었다. <계속>

자료제공 | 『하나님의 기적, 대한민국 건국』(이호 목사 저)

위 글은 교회신문 <376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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