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 인생 주님 위해 살렵니다
이영숙 성도(제1교구 1지역 궁동 14구역)

등록날짜 [ 2006-08-16 11:25:49 ]

예수 믿으니 불 같이 거센 성격이 순한 양으로 변해
심장병·40년 시달린 두통·술주정 씻은 듯 사라져



36년간 불자인 내가 교회에 가게 된 것은 연년생으로 아들을 낳은 딸 산후조리를 해주러 왔다가 딸과 사위의 간곡한 부탁을 뿌리치지 못해서였다. 심장이 좋지 않은데도 딸 사위가 미안해 할까봐 몰래 약을 먹어 가며 산바라지를 해주는 형편이었는데 삼칠일도 지나지 않아서 교회에 가겠다고 나서는 딸에게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래도 자식이다 보니 갓난쟁이 둘을 데리고 교회에 간다고 나서는 것이 안쓰러워 따라나섰다. 하지만 마음으로는 불제자로서 교회에 간다는 것이 그저 부처님께 죄송해서 관세음보살만 중얼거렸다.

불제자로 살아온 36년
내가 절과 인연을 맺은 것은 결혼 직후였다. 23살 때 대구 반야월에 제법 큰 부자 집의 9남매 장남인 사람을 만나 결혼을 했다. 하지만 현실은 꿈꾸던 결혼 생활과는 거리가 멀었다. 줄줄이 시동생들을 챙겨가며 논과 밭으로 일하는 일꾼들의 새참을 챙기다 보니 몸은 고달팠고, 집안일에 관심 없는 남편 때문에 마음 붙일 곳이 없었다. 그래서 스스로를 술로 위로하며 마음의 안식을 찾기 위해 절을 찾았다. 다른 사람이 쌀 한 되를 사오면 나는 가마니로 드리는 헌신적인 열성을 보였다. 집에는 지장보살, 관음보살을 모셔두고 열심히 빌며 매달 초사흘과 지장제일은 빠짐없이 챙겼다. 머리가 복잡하면 천수경을 읽으며 그렇게 절에 빠져 살았다. 36년간 불공을 드려가며 아이들에게 남편에게 조금의 화가 있다고 하면 액땜한다고 굿판을 벌리기 일쑤였다. 아들만 장가보내고 절에 들어가 산다고 할 정도로 나는 그 곳에서 위안을 삼으며 평생 절로, 굿으로 수많은 돈을 쏟아 부으면서 살았다.
세월이 흐르면서 남편도 가정적으로 변하고 대구 시내에서 새로 시작한 시멘트 도소매 사업도 때를 잘 만났는지 큰 돈도 원없이 벌어보았다. 그러던 중 IMF 직전에 경북대구지역의 큰 주택업체가 연이어 부도를 내면서 시멘트 대금을 못 받아 엄청난 타격을 받았다. 더구나 보증까지 잘못 서서 모든 재산이 순간에 남의 손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보증을 서줄 만큼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고 모든 재산이 손써보지도 못하고 압류가 들어오자 삶의 의욕을 상실했다. 계획적으로 재산을 빼돌려 부도를 내놓고 버젓이 고개를 들고 사는 그들의 모습을 보노라니 울분이 치밀어 올라 살 수가 없었다.
어렸을 때 친어머니를 여의고 힘들게 살아와서인지 성격이 불같아 작은 일에도 화를 내며, 욕도 거침없이 내뱉는 다혈질적 성격 탓에 더더욱 울분을 참지 못해 여러 번 죽으려고도 했었다. 내 손에 움켜쥔 재산으로 평생 잘 살 줄 알았는데 그렇게 허무하게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렸다.

딸 산바라지 하면서 예수를 영접해
한참 사업이 잘 될 때 막내딸이 몰래 공장의 차를 빌려 다니던 교회의 이사를 도우려던 적이 있었다. 일을 시키려고 기사에게 연락을 했더니 선애가 차를 빌려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차를 빌리려는 이유를 듣고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중고등학교를 기독교 학교에 배정되어 그것을 계기로 교회에 다니는 딸이 항상 못마땅했다. 결국 한바탕 난리를 내고는 끝내 차를 내주지 않았다.
막내딸 결혼식 때 많은 사람에게 청첩장을 보냈지만 우리의 형편이 어려워지자 모두 등을 돌리고 와주지 않았다. 썰렁한 식장을 선애가 다니던 교회 교인들이 자리를 채웠다. 다시 한 번 사람들로부터 배신감을 맛본 나는 심한 우울증으로 고통당해야만 했다. 그래서 선애가 첫아이를 낳았을 때도 우울증과 심장이 조여 오는 협심증으로 인해 겨우 10일밖에 몸조리를 해주지 못했다. 그게 항상 미안해서 둘째 땐 한 달은 해줘야지 하는 마음을 먹었었다.
올 4월 18일 둘째아이를 출산한 막내딸 산바라지를 위해 서울에 올라왔다. 그런데 딸이 시켰는지 예배 때만 되면 사위가 나를 데리고 교회에 가서 맨 앞자리에 앉혀놓았다. 몸조리가 끝날 때쯤엔 본 교회 부흥성회가 있어 그때는 또 딸에게 이끌려 매일 성회를 참석하게 되었다. 가랑비에 옷이 젖듯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에 젖기 시작했다. 목사님이 설교 중에 “인생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그게 바로 내 모습이었다. 그 많던 재산 다 날리고 빈손으로 앉아 있는 나를 보고 하시는 말씀인가 싶어 놀라기도 했다. 정말 부처님께 매달리고 굿하고 살아온 나의 삶이 목사님 말씀처럼 ‘마귀의 장난에 속은 것인가?’ 하는 의문이 생겼다.
그러던 어느 날 찬송을 부르는데 목이 메이고 눈물이 났다. 36년간 불제자로 살았던 내가 하나님 앞에 이렇게 주책없이 눈물콧물을 쏟다니! 내 모습 자체가 내겐 충격이었다. 또 설교말씀을 듣다가 절에 다니고, 술 먹고 행패부린 모든 것들이 ‘죄'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땐 더 큰 충격으로 부끄러워 고개조차 들 수가 없었다. 그렇게 몇 번 교회다니다 보니 약을 봉지째 싸들고 다니던 심장병이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졌다.

예수로 새롭게 태어나고
한달 보름만에 딸의 산바라지를 끝내고 대구 집을 내려갔더니 집이 휑했다. 남편이 핸드폰고리부터 시작해서 부적, 불상, 염주, 액자 등 절과 연관된 모든 것을 떼어낸 것이다. 예전 같으면 난리가 나도 수십 번 날 법한 일인데 이상하게 화가 나질 않았다.
“이왕 예수 믿을 거면 확실히 믿으라고 다 떼어냈다”는 남편에게 오히려 고마운 생각까지 들었다.
대구에 와서도 목사님의 얼굴이 아른거리고 예배가 사모되어 주중에 서울에 올라와 주일예배를 드린다. 어떤 땐 삼일예배, 금요철야까지 드리다가 2주를 머무를 때도 있는데 그때마다 남편에게 미안하다. 하지만 과거와는 180도로 온순하게 변화된 나의 모습에 마냥 기뻐하는 남편은 전폭적으로 나를 밀어주고 있다.
이번 장년부하계성회에도 참석했다. 처녀시절부터 두통에 시달려 40년 동안 진통제를 필수품으로 챙기고 다니던 나에게 선애가 “엄마 그러지 말고 우리 믿음으로 해보자”는 말에 약 없이 흰돌산 수양관을 향했다. 머리가 쥐어짜듯 아파왔지만 그때마다 “머리 아프게 하는 귀신아 예수 이름 앞에 떠나가라”고 부르짖으며 기도했다. 특별한 병명 없이 그렇게도 오랫동안 나를 괴롭혔던 두통이 거짓말처럼 기도하면서 사라졌다. 진통제 없이는 잠을 이룰 수 없었던 나는 정말 오랜만에 단잠을 청할 수 있었다.

성도들이 은혜받기를 바라는 간절한 심정으로 장시간의 설교를, 그것도 절규에 가까운 설교말씀을 하시는 걸 들으면서 오히려 가만히 앉아서 예배드리는 내 모습에 갑자기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목사님의 저 열정은 과연 어디서 나오는 걸까? 이렇게 많은 성도들 다 은혜받아 영혼의 때에 천국에 가게 인도하려고 저렇게 애를 쓰시는 건가?’ 하고 생각하니 고맙고 감사했다. 그 모든 힘이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는 딸의 말에 ‘그래, 사람의 힘으로는 저렇게 할 수 없지. 진짜 하나님이 살아계시는구나' 하는 생각에 더욱 확실한 믿음이 생겼다.

요즘에는 아침에 눈을 뜨면 찬양하고, 목사님 저서와 테이프를 즐겨 듣는다. 늘 기쁨과 감사가 넘친다. 서울에서 대구로 오가며 신앙생활 하는 것이 경제적으로, 육체적으로 힘들 때도 있지만 ‘예수님은 날 위해 죽으셨는데 나는 그런 예수님을 위해 무얼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불교인들을 만나면 예전의 내모습을 보는 것 같아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을 동원해 복음을 전한다. 늦게 예수님을 만났으니 남은 생애 동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만 하며 살고 싶다. 할렐루야!!

위 글은 교회신문 <92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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