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변 새댁의 우울증, 예수님이 치료하셨습니다!
김연화 성도(제1교구 1지역 궁동 10구역)

등록날짜 [ 2006-09-13 10:49:24 ]

전도자의 따스한 인도로 십자가 보혈 체험
예수님을 만나니 나의 삶에 행복 가득 넘쳐



남편 따라 한국으로
중국 연변의 안도에 살던 나는 직장에서 남편을 만나 결혼을 했다. 연고자 하나 없이 남편만 믿고 2004년 한국에 따라온 나는 시댁인 제주도에서 시부모님과 같이 살며 몹시 힘든 생활을 했다. 제주도 사투리를 거의 알아들을 수 없는데다 시댁살림살이는 넉넉치가 못했다.
게다가 “조선족 처녀들이 위장결혼을 하고 살다가 국적을 얻으면 떠나간다"는 소문이 있어서인지 시댁식구들은 색안경을 끼고 나를 봤다. 다정한 말 한 마디 없이 매사에 무시하는 말투였다. ‘내가 왜 낯선 이곳까지 와서 이 고생을 해야 하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늘 우울했다. 그런데 결혼 전 당했던 교통사고 후유증이 나타나면서 오랜기간 고생을 했다. 불편한 몸을 가까스로 추스른 남편과 나는 차라리 서울로 가자고 결정해 올해 4월 시외숙모 댁이 있는 서울 구로구 온수동으로 왔다.
서울 외숙모 댁도 생활이 어렵긴 제주도나 마찬가지였다. 서울에 오기만 하면 남편의 직장을 금방 구할 줄 알았는데 교통사고 후유증이 있어서인지 이력서를 내도 연락이 없었다. 아이는 태어나서 키워야하는데 생활은 점점 더 어려워졌다. ‘시댁식구들 중 누군가라도 도와주겠지’ 하는 내 마음과는 달리, 다들 먹고살기 어려워 돌아보지 않자 원망은 점점 커져만 갔다.

예수가 누구기에
그러던 어느 날 오류전철역 계단을 내려오는데 누군가 다가와 “예수 믿으세요!”라고 하면서 ‘영혼의 때를 위하여’라는 신문을 내밀었다. “이게 뭐야?" 평생 처음 보는 글귀에 알아듣지도 못하는 말들을 내게 한참을 늘어놓았다. 예수님이 나 때문에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셨다고, 예수 믿고 천국 가자고, 자기가 다니는 교회에 꼭 한번 오라는 것이었다. 연변에 살 때 엄마가 가끔 교회 나가면 한두 번 따라간 것이 전부인 내게 ‘예수'라는 이름은 너무나도 생소했다. 남편은 내 팔을 잡아 이끌며 얼른 가자고 재촉했다. 전화번호만 알려주고 그 전도자를 뒤로 한 채 집으로 돌아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길에서 그렇게 예수를 전하는 사람들이 이해가 안 됐다. ‘그 시간에 일자리를 구하고, 돈 벌러 나가면 훨씬 더 이득인데 왜 저럴까?’ 집에 와서 신문을 펼쳐보니 온통 알아듣지 못하는 말뿐. 그런 중에도 ‘예수가 누구인데 이렇게 좋은 종이에 이런 얘기들로 가득한 것인가?’궁금증도 생겼다. 다음날 그 전도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구역장과의 만남
그 전도자는 자기가 다니는 교회를 소개하며 주일에 꼭 한번 나오라고 했다.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고, 서울에 올라와 아는 사람도 없는데 한 번 가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5월, 남편과 처음 교회에 발을 내딛는 순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큰 교회도 있나?’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예배시간에 그 큰 성전이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목사님을 향하였고 “아멘” 소리 또한 우렁찼다. 둘러보니 어떤 사람들은 설교를 들으면서 눈물까지 흘리고 있었다. 첫날 예배시간은 집중도 못한 채 그렇게 지나갔다. 그러면서 솔직히 마음 한편에서는 ‘이렇게 사람들이 많으니 누군가의 도움으로 남편 직장도 구하고 생활도 안정되지 않을까’하는 기대감도 들었다. 그 다음 주일부터는 말씀을 집중해서 듣기 시작했다. 나를 전도한 박경자 구역장을 비롯해 지역장, 교구장이 계속 찾아와 예수님에 대해 자세히 소개해 주었다. 그리고 말씀을 들으니까 설교말씀이 조금씩 이해가 됐다.
그 무렵 남편과 나는 계속 시외숙모 댁에 눌러 살기가 어려워 따로 살림을 나오기로 했다. 그들은 우리에게 다시 제주도로 내려가라고 했지만 제주도 사투리를 거의 알아듣지 못해 너무 힘들었던 터라 다시 가고 싶지 않았다. 돈 한 푼 없는데 남편이 한 달가량 일한 곳에서 월급을 주지 않아 생활이 말할 수 없이 어려웠다. 노동부에 남편의 구직 등록을 하고, 체불임금조정도 신청하느라 무척 바빴다.
구역장도 가게를 하고 있어 바쁜데 거의 매일 찾아와 함께 방을 구하러 다녔다. 그러다가 겨우 방 한칸을 얻었다. 구역장은 이불이며 옷가지, 가제도구며 필요한 대로 자신의 것을 나눠주었다. 커튼이며 서랍장, 그릇까지 말없이 갖다 놓고 가는 구역장이 너무너무 고마웠다. 때마침 한 교우가 산업연수생으로 한국에 왔다 중국으로 돌아가면서 자기들의 살림살이를 우리에게 주었다. 한국에 와서 상처만 받고 살았던 나는 이런 친절에 ‘예수 믿는 사람들은 다 이런가?’ 처음엔 무척 놀랐다. 그 후로도 계속되는 구역장의 관심에 내 마음이 차츰 열리기 시작했다. 늘 사람을 경계하던 나의 태도가 차츰 변화되면서 예배를 통해 은혜를 받기 시작했다.

기도 중에 예수님의 십자가 만나
7월 31일부터 3박 4일간 흰돌산수양관에서 장년부하계성회가 열렸다. 함께 가자고 구역장과 여전도회장이 권면을 했다. 13개월 된 아기를 데리고 흰돌산수양관에 도착하니 먼저 그 규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성회 첫날 ‘생각'에 대해 자세히 말씀하시는 목사님 말씀에 나 자신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보게 됐다. ‘생각은 자신의 미래의 길’이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옳은 생각을 해야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 동안 미움과 원망으로 가득했던 내 모습이 부끄러울 뿐이었다. 예배시간마다 구역장이 아기를 봐주어서 나는 대성전 맨 앞자리에 앉아 목사님 말씀을 집중해서 들을 수 있었다. 시간시간 회개가 저절로 터져 나오고 한마디도 못했던 기도가 술술 나왔다.
기도 중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피 흘려 돌아가시는 모습이 보였다. 그 십자가 아래에 내가 있는데 예수님의 피로 내 온몸이 씻어지고 있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다는 사실이 정말로 믿어졌다. 성회 셋째 날 은사집회 시간에 큰 소리로 방언이 터져 나오며 내 마음은 온통 기쁨으로 가득 찼다. 하나님이 ‘무엇이든지 내 이름으로 구하라 그러면 시행하리라’고 말씀하셨다고 했는데 정말 그 말씀대로 시행하시는 분이라는 것이 깨달아졌다.
배가 당기며 아이 낳을 때처럼 숨도 쉬지 못할 정도로 간절히 기도했다. 눈물, 콧물 범벅이 되면서 시댁 식구들을 원망했던 것이 회개 되었다. 그뿐 아니라 시댁에도 구원의 문이 열리기를 간절히 바라시는 주님 심정이 깨달아졌다. 시부모님 생각만 해도 가슴이 답답했는데 시부모님의 영혼구원을 위한 기도가 나오다니 참으로 신기했다. 순간 하나님은 나를 통해 시부모님과 시형제도 구원받기를 간절히 원하신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계성회에 다녀온 이후에 한국에 와서 스트레스로 인해 생긴 우울증, 그리고 가슴이 늘 무겁고 바늘로 찌르는 듯 답답해 ‘이거 큰 병 아닌가?’ 하는 불안함도 씻은 듯이 사라져 버렸다. 예수 믿은 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난 지금 행복하다. 남편도 남전도회에 소속되어 열심히 예수를 알아가며 직장도 구했다. 지금도 구역장은 주일낮 예배 때마다 아기를 봐 주고 나는 대성전앞자리에서 예배를 드리며 은혜를 받고 있다. 지금은 제주에 계시는 시부모님과도 전화를 하며 조금씩 전도의 문을 열고 있다. 응답을 믿고 새벽예배 때마다 적은 예물이지만 매일 하나님 앞에 믿음을 보이며 기도제목을 적는다. 다음에 있을 침례식이 기다려진다. 침례 받고 성가대 지원하여 날 구원하신 주님을 찬양하고 싶다.

위 글은 교회신문 <94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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