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우리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요?
김문균 성도(제14남전도회)

등록날짜 [ 2007-01-10 13:35:42 ]


우울증, 그 끝 모를 긴 터널 속에서
한 집안의 가장(家長)인 내가 우울증을 앓은 지 어언 16년. 삼십대 초반에는 멀쩡하게 직장 일 잘하다가도 한 번씩 머리가 찡해지면 일을 할 수가 없어 얼마간 휴직하기를 반복했다. 지금 대학교 1학년생인 큰아들이 6살 때쯤엔 아예 서울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인 여수로 내려갔다. 거기서 전기공사 일을 하면서 착실히 공부해 자격증을 땄고 IMF 직후엔 현장소장으로 승진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전임자였던 친척이 자기 집안 식구들까지 동원하여 심한 반발을 하는 통에 심리적인 충격을 받아 우울증세가 폭발하듯 드러나고 말았다. 심한 대인기피증에다, 머리가 쪼개질 듯한 극심한 두통, 가슴이 벌떡거리고 머리가 멍해져서 손바닥 들여다보듯 훤하던 도면이 ‘흰 것은 종이요 검은 것은 글자’일뿐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상태가 되자 승진 일주일 만에 사직을 하고 말았다. 수년간 공들여 노력한 대가가 하루 아침에 물거품이 됐다는 좌절감에 휩싸여 두문불출 방안에서만 지냈다.
설상가상으로 자율신경실조증까지 겹쳐서 내장이 돌덩이처럼 딱딱하게 굳어졌고 한 달 만에 몸무게가 10킬로그램이나 빠졌다. 때론 하반신이 마치 벌에 쏘인 듯 근육이 군데군데 단단하게 뭉쳤다. 시도 때도 없이 근육이 제멋대로 움직여 불면증에도 시달렸다. 그런 증상이 2년 남짓 계속된 후 조금씩 호전의 기미가 보이자 취직을 했지만 막상 일을 하려고만 하면 또 다시 머리가 멍해지고 아무 기억도 나지 않는 증세가 거듭됐다. 그러니 10여 년 세월이 흘렀어도 직장생활은 거의 하지 못했고 늘 우울증으로 세월을 흘려보냈다. 그러니 생활은 말이 아니었고 아내의 시름은 깊어만 갔다.

하나님을 외면한 세월들
처녀 시절부터 교회에 다녔다는 아내는 나의 우울증세가 심해지면서부터 교회에 부쩍 더 열심히 다녔다. 아내는 의학으로 안 되니까 하나님을 한번 의지해보라고 말하였지만 나는 왠지 교회고 목사님이고 싫기만 했다. 그래도 아내가 다니는 교회 목사님이 영성훈련센터나 기도원 같은 곳을 데리고 가면 휴양삼아 며칠씩 따라갔다. 다녀오면 한결 기분이 좋아지긴 했어도 하나님의 존재가 확실치 않고 교회를 향한 마음의 문이 열리지 않아 좀처럼 다녀지지가 않았다. 그러던 중, 2005년 초 아내가 꾸려가던 자그마한 슈퍼마켓마저 운영이 어려워 우리 가정으로서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을 때, 아내가 결심을 한 듯 내게 하나님을 믿자고 강력하게 말했다.
“남편이 건강하지도 못하고 돈도 없는 나를 사람들은 불쌍하게 보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난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까지 낮추신 것을 감사하게 생각해요. 여보, 하나님은 정말 살아계신 분이에요. 당신이 하나님을 붙들기만 하면 당신의 우울증은 반드시 치유돼요. 아무리 당신을 설득해도 하나님을 믿지 않으니 너무 답답해요. 나도 이젠 더 이상 물러설 수 없어요, 만약 당신이 이렇게 계속 세월만 낭비하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면 난 당신과 이혼할 거예요.”
아내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내의 모진 결단 때문에 난 우울증으로 고통 받은 지 10여년 만에 교회주변을 맴돌던 생활을 청산하고 하나님께 예배드리게 됐다.

조울증으로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며
지금 생각하면 하나님께서 나의 앞날에 어떤 흑암이 드리워져 있는지를 아셨기에 아내를 통해 그렇게 강권적으로라도 하나님 앞에 불러낸 것이 아닌가 싶다.
내가 교회에 나간 직후, 바로 내게 이상한 증상이 나타났다. 소위 조울증이란 증상으로 우울증보다 훨씬 위험한 증상이었다. 우울증이 기분이 우울한 느낌이라면, 조울증은 좀처럼 감정조절이 안될 만큼 들뜨기 시작하면서 돌발적인 행동을 거침없이 한다. 한밤중에 남의 집 전기를 수리해주러 가기도 하고, 아내가 무슨 말을 하면 화가 솟구쳐 언성을 마구 높였다. 두통이 너무 극심해 약을 먹어도 아무 효과가 없었다. 의사들이 위험한 상태라고 해서 가족들이 애써 나를 설득하더니 정신과병원에 입원을 시켰다. 막상 정신이 혼미한 환자들과 어울려 지내다보니 정말 그곳에서 영원히 못 빠져나갈 것 같은 생각에 두려움이 엄습했다. 병원 규정에 따라 한 달 만에 일시 퇴원을 해서 집에 돌아왔지만 고3, 고1인 아들들에게 아무것도 뒷받침해줄 수 없는 나 자신이 너무 무가치한 존재로 느껴져서 목숨을 끊을 방법만 모색하고 다녔다. 집에 혼자 있을 때도 내가 꼭 무슨 일을 저지를 것만 같아 다시 병원에 넣어달라고 호소했다. 그렇게 수없이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면서도 고 3인 큰아들이 밤늦도록 2~3시간씩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 정말 하나님이 살아계신데 내가 왜 이러나 싶고, 아들에게 보탬이 되는 아빠가 되기 위해서라도 꼭 재기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아내와 아이들, 그리고 여수중앙교회 목사님과 사모님 그리고 교우들의 눈물뿌린 간절한 중보기도로 나는 조금씩 회복됐다. 큰아들이 한창 대학진학 원서를 작성할 그 시기에 나는 3개월 동안 병원에 들락거리느라 집안이 조용할 날이 없었지만 신앙의 힘으로 조금도 흔들림 없이 기도와 학업에 열중해 결국 2006년에 서울에 있는 숭실대학교에 입학했다. 그리고 중고등학교 시절 한 번도 빼놓지 않고 다녔다던 흰돌산수양관 성회, 큰아들은 바로 그 목사님이 계신 연세중앙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큰아들은 성령충만한 연세중앙교회에서 열심히 신앙생활 했고, 남은 세 식구는 여수에서 열심히 신앙생활 했다. 그러던 중, 아내가 기도 중에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는 감동을 받았다며, 서울 쪽에 이력서를 내보라고 했다. 사실 고향 여수에 온 지 16년여 동안 온통 우울증으로 고통 받고 벌어놓은 물질은 다 바닥나고 운영하던 슈퍼마켓도 이미 문을 닫을 지경이었으니 떠난다 해도 아무런 미련이 없었다. 몸이 회복되자 인천 쪽에 이력서를 냈더니 취직이 돼서 2006년 7월에 내가 먼저 인천으로 왔고, 한달 후에는 아내와 둘째아들이 서울로 올라왔다. 전셋집 한 칸 마련할 형편이 아니었는데 뜻밖에 처가의 도움으로 서울에 거할 장막을 마련할 수 있었고 우리 네 식구가 연세중앙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게 됐다.
우리 가족이 등록한 후 아내는 곧바로 나를 기관에 배속될 수 있도록 부탁해 바로 14남전도회 회원이 됐다. 내 상태가 상태이니만큼 아내는 빨리 교우들의 중보기도지원을 요청하고 싶었던 것이다. 어찌됐든 나는 14남전도회원들의 중보기도와 관심으로 교회에 잘 적응하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주일성수는 물론 모든 공예배에 거의 다 참석하게 됐다.

아내의 행복
올해 10월 경, 김종선 담임목사 사모님께 기도를 받은 후, 놀라운 일이 생겼다. 우울증이 심하게 나타난 이후, 자율신경실조증으로 10여 년간 늘 불면증에 시달렸던 내가 잠을 자게 된 것이다. 또한 자율신경실조증으로 근육이 뭉치고 떨리던 증세도 사라졌다. 그리고 늘 우울하던 얼굴의 인상이 너무나 환한 인상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제는 하나님이 분명히 살아계신 것을 체험했으니까 어떤 어려움이 온다할지라도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할 때 해결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됐다.
나 때문에 고생만하고 산 아내가 요즘 부쩍 얼굴빛이 밝다. 아내는 혼자서 하나님께 이렇게 묻는단다. “하나님 저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요?”라고 말이다. 아내의 행복은 바로 내게 일어난 변화 때문이다. 나의 변화로 요즘 우리 가족은 정말 행복 속에 살고 있다. 지긋지긋하던 우울증이 떠나가고 , 하나님이 주신 행복으로 말이다.

위 글은 교회신문 <102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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