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의 끝에서 붙드신 하나님
김창귀 성도 / 제14남전도회

등록날짜 [ 2007-04-11 15:41:20 ]

항상 싱글벙글 웃으며 먼저 인사를 하는 김창귀 성도. 스무살에 고압선 감전으로 두 손을 절단하고 대인기피증과 병명을 알 수 없는 수많은 자각증상들로 인해 20여년 동안 고통 받던 그가 절망의 끝에서 하나님을 붙들었다. 약 없이도 하루를 살게 하시고, 짜증대신 기쁨으로 충만하게 그의 삶을 바꾼 주님이 주시는 참 평안을 함께 맛보자.



왼손마저 절단하라고요?
전남 고흥군에서 한참 들어가는 섬에서 자란 나는 겨울에 김 양식 한 것으로 한 해를 살아야하는 가난이 싫어 78년 3월, 스무살에 청운의 꿈을 안고 상경하였다. 서울에 와서 처음 취업한 곳이 LPG 부판점이었다. 가정집은 가스배관이 고무 호스지만 상가는 아연관가스배관으로 돼 있다. 나의 업무는 가스배달과, 가스배관기술자의 보조일이었다. 일 년이 넘도록 허드렛일을 돕다보니까 가스배관실무를 익히게 됐다. 어느 날 상가건물 재공사 의뢰가 들어왔는데 기술자가 다른 볼 일이 있어 그 일을 내가 맡게 되었다. 그런데 행운이라고 생각한 그 일이 일생일대의 비극의 단초가 될 줄이야. 상가 1층에서 3층 옥상까지 연결된 기존 배관을 철거하고 이어서 9미터짜리 파이프를 끌어올리는데 갑자기 큰 천둥소리와 같은 굉음이 들리면서 나는 붕 나가떨어졌다. 3층 옥상 1미터 위로 흐르던 2만2천 볼트의 고압선에 감전된 것이다. 눈을 떠보니 시커먼 구름 하늘을 뒤덮고 있었고 사람들이 불이야 소리치며 나에게 물을 끼얹었다. 어디론가 나를 데려가려는 사람들의 얼굴이 흐릿해지며 의식을 잃었다. 눈을 떠보니 병원이었다. 입원 보름 만에 오른손 절단 수술을 받았다. 한 손을 잃은 상실감에서 채 벗어나기도 전에 보름 후 왼손도 절단 수술을 받았다. 망연자실. 눈물로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 외에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생각을 바꾸자
20대 초반인 내가 치부를 드러내며 뒤처리를 받아야 하는 수치심에 밥을 제대로 먹을 수 없었다. 6개월 병원생활을 하며 소량의 식사로 변비가 생겼다. 죽고 싶다는 극단적인 생각도 했지만 그래도 ‘살아야겠다, 어떻게든 살아지겠지’라는 본능이 지배적이었다. 병원 안에 있을 땐 다 같은 처지라 서로를 위로하며 위안을 삼기도 했지만 막상 퇴원을 하고 세상에 나와 보니 무섭고 두려웠다.
병원에선 의수를 착용하면 일상샐활에 불편함이 없을거라고 희망을 주었지만 막상 사용해보니 내 마음처럼 움직여 주질 않아 성격만 괴퍅해졌다. 집에서 하루종일 라디오 방송을 듣던 중 나보다 더한 상태에 있는 어느 장애인의 “살아있음에 감사하다”는 수기를 듣고 ‘그래 생각을 바꾸자’ 마음을 다잡았다. 노력 끝에 의수 사용도 자유로워져 ‘이 정도면 뭐든지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으로 2년 만에 다시 상경했다. 취업하려고 노력했지만 뜻대로 되질 않아 고향에 내려가 사고 보상금으로 축산업을 시작했는데 일 년 만에 보상금의 절반을 탕진하고 말았다.
남은 돈을 들고 다시 서울로 올라와 여동생과 지금의 서점을 시작하였다. 그때까지도 사람 앞에 나서기를 주저주저했던 나는 동생에게 서점을 맡기고 그날 매상을 술값으로 써버리기 일쑤였다. 내가 책을 제 때 조달해 주지 못해 학생 손님들이 되돌아갔고 그렇게 남은 보상금마저도 탕진하며 마이너스 운영을 하고 있었다.

병명 없는 병들
우연한 기회에 지금의 아내를 만나게 되었다. 내 욕심인 줄 알면서도 다시는 기회가 오지 않을 것 같아 매달리다시피 그녀를 붙들었다. 처가에서는 아내에게 “네가 제 정신이냐? 살다보면 분명히 후회한다”며 모진 말로 결혼을 반대했다. 하지만 장인어른이 우리들의 사는 모습을 보시고 나를 “김 서방”이라 부르더니 어느 때부턴가 “창귀야”라고 부를 만큼 나를 살갑게 대해주셨다.
결혼 후 서점을 확장하며 ‘나에게도 봄은 오는구나!’ 하는 행복도 잠시. 86년도부터 여기저기 몸이 불편하던 자각증상들이 결혼하고 몇 년이 지나자 점점 더 심해졌다. 머리는 무겁고, 눈앞이 뿌해지며 피곤하여 견딜 수가 없었다. 이런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인간의 방법으로 해보지 않은 방법이 없다. 좋다는 약과 병원을 찾아 다녔고, 반년 동안 내 소변도 받아 마셨다. 병원에선 정상이라는 진단을 내리는데 머리에선 비듬이, 온 몸에선 각질이 쏟아졌다. 다리는 후들거리고 잠을 자고 일어나도 눈은 항상 충혈 되면서 20kg넘도록 살이 빠졌다. 신경은 칼날처럼 날카로와져 아이들과 아내에게 많은 상처를 주었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몸이 아프다 보니 수많은 사람들이 전도해도 거절했던 연세중앙교회를 2005년 1월 나 스스로 나오게 되었다. 하지만 마지막이란 생각으로 찾은 교회에서 마저 아무런 해결책을 제시해 주시 못했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극단의 조치로 서점을 아내에게 맡기고 귀향을 했다.

물러설 곳이 없어요
어느날 아내에게 서점에 대한 논의가 있다는 연락을 받고 서울로 올라와 보니 아내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나를 만나 고생만 하여 병을 얻었나 싶어 다음날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해보니 위암이었다. 그나마 다행히 초기 위암이라 항암 치료 없이 수술로 끝났다. 아내마저 병든 몸이 되고 보니 더 이상 내 인생에 물러설 곳이란 없었다. 그 때부터 그렇게 듣기 싫고 판단만 되던 윤석전 목사님의 설교 말씀에 한 가닥 위안을 얻고자 귀를 기울였다. 그제야 비로서 내 귀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왔다.
내가 예배 시간시간마다 애가 타서 속이 터져라 말씀을 전하시는 목사님을 판단하고, 통성으로 기도하는 이들을 이상히 여기며 실상은 내가 주님께 손 내밀지 못함을 깨달았다.
끝없이 사람들을 통해 나를 부르신 하나님의 음성을 뒤로하고, 하나님의 도움심을 거부하며 육신의 고통도 내가 해보려던 나의 초라한 믿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나의 악해진 근성을 버리고 나는 진정 하나님께 순종하며 나아갔다. 나도 남들처럼 손을 들고 목이 터져라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기도하다보니 하나님께서는 내게도 간절함과 애끓는 심정을 주셨다. 창자가 끊어지는 하나님과 동한 심정이 생겼다.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고, 인간적인 모든 방법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의지할수 있는 믿음을 주셨다. 20년동안 먹었던 수많은 약을 끊고 매일매일을 기도하며 하나님의 도움을 살게 되었다.

보너스로 받은 가족구원
아내도 예수 믿는 처형이 간병하며 전하는 복음을 듣고 믿음이 생겼다. 거부감 없이 은혜를 사모하던 아내는 주님의 은혜로 회복이 빨랐다. 나의 기도 시간이 많아지면서 방언 은사도 받고, 가정의우상숭배도 끊어졌다. 매일 짜증이 충만했던 내가 변화되면서 믿지 않던 가족들도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간접 체험 하게 되면서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다.
시골에 계시던 아버지도 나의 변화된 모습을 보고 교회에 나와 하나님을 영접하였고, 우리 연세중앙교회의 영적인 말씀이 사모되어 종종 올라오신다.
막연히 위안을 삼고자 하는 목적으로 찾은 하나님은 기복이 심하여 중도에 포기하기가 일쑤였던 나를 작은 고지부터 점령하게 하더니, 이제는 높은 고지도 도전할 수 있는 힘을 주셨다.
심각한 짜증과 신경질을 이길 힘을 주셔서 깨지려 했던 우리 가정을 하나 되게 하셨다. 기쁨으로 서점 운영을 할 수 있는 활력을 안겨주어 이전 후 확장을 하게 하시고 기독교서점으로 거듭나게 하셨다.
약 없이 하루하루를 기쁨과 감사로 살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여 요즘은 서점을 찾는 학생들을 전도하기에 바쁘다. 그리고 다시 넘어지지 않으려고 히브리서 4장 12절 말씀을 마음에 늘 새기며 산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나는 고치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과 감사를 돌린다.

위 글은 교회신문 <108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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