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예수] 사선(死線)을 넘어 주님의 품으로
김숙영 (가명, 새터민선교실)

등록날짜 [ 2010-09-20 23:58:16 ]

감옥에서 들리던 찬송 소리에 하나님 의지해 탈북
우리 교회를 통해 온 가족 예수 믿고 ‘새 삶’ 얻어


중국에서 붙잡혀 신의주 감옥으로
중국에 일하러 갔다가 2002년에 북한 당국에 적발돼 북송됐다. 단둥을 거쳐 신의주 감옥에 갇히자마자 나는 하혈로 쓰러졌다. 거의 열흘 동안 하혈하니 아무리 강요해도 똑바로 앉아 있지 못했다. 결국 교관이 와서 누워 있으라고 허락했다. 그런 지경이니 살아서 고향 집으로 돌아가기는 다 틀린 일 같았다. 탈북자들에 대한 조사는 엄청나게 까다로워서 한번 붙잡히면 서너 군데서 조사를 받고 집에 돌아가는데 족히 1년은 걸린다. 그러니 도저히 살아서 감옥을 나갈 것 같지 않았다.

당시 다섯 살짜리 큰아들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모든 희망이 끊어지고 죽음의 공포가 몰려올 그때, 불현듯 중국 교포들이 말하던 ‘하나님’ 생각이 났다. 같이 일하던 중국 교포들이 “교회에 가서 하나님께 예배드리자”고 할 때마다 “세상에 하나님이 어디 있어? 너희가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나” 하며 비방했는데 의식이 가물거리는 절박한 상황에서 하나님이 떠오른 것이다. 죽은 듯 누워 기도란 걸 처음 했다. ‘하나님, 저를 이 자리에서 꺼내 살려주시든가, 아니면 고통받지 않고 빨리 죽게 해주세요. 만약 저를 여기서 살아나가게 해주시면 꼭 하나님을 믿겠습니다.’

바로 그때였다. 옆에서 찬송가 소리가 들렸다. “일어나 걸어라 내가 새 힘을 주리니 일어나 너 걸어라 내 너를 도우리~” 중국 교포들이 부르던 찬송가였다. 깜짝 놀라서 옆에 앉은 젊은 여자에게 “지금 너 찬송가 불렀냐?”고 물었더니 “아, 이 언니가 죽으려고 허튼소리 하는구먼!” 하며 투덜거렸다. 정말 내가 죽으려고 헛소리를 들었나 싶어 눈물이 나왔다. 그런데 귀에는 여전히 찬송가가 들려왔다. 일어나 걸으라는 것이었다. 그때 간수가 오더니 “집에 보내주면 가겠느냐?”고 물었다. 그 소리를 듣자 어디선가 힘이 솟아났다. “기어서라도 갈 테니까 제발 빨리 보내만 주세요”라고 간절히 부탁했다. 그날, 나는 탈북조사를 받으려고 대기하고 있는 100여 명을 뒤로하고 단 30분 만에 모든 조사를 마쳤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일어나 걸으라 내가 새 힘을 주리니~”라던 찬송가처럼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일어나 걸어서 신의주 감옥에 들어간 지 20일 만에 무사히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다.

다시 한국으로 탈북
다시 북한에서 살자니 참으로 한심스러웠다. 중국에 비해 너무나 먹을 것이 없고 잠시나마 자유의 맛을 봐서인지 독재 체제에서 사는 것도 지겨웠다. 도저히 이렇게는 못 살겠다 싶어 다시 하나님께 기도했다. “하나님, 저 이렇게 살려주셔서 감사한대요, 중국을 통해서 한국으로 가고 싶어요. 저 살려주셨으니까 한국까지 가는 길에서도 잡히지 않게 해 주세요. 그러면 한국 땅에 가서 마음껏 하나님을 믿겠습니다.”

그 후 남편과 아들과 함께 다시 탈북을 감행했다. 중국은 경비가 심했지만 한족들이 선의를 베풀어 장춘까지 무사히 갔다. 한국으로 가는 길을 찾으려고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경원에서부터 걸어서 남으로, 남으로 향했다. 민가로 들어가면 신고 당한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서 산등성을 타고 오로지 나침반에 의지해서 계속 남쪽으로만 걸어갔다. 언제 붙잡힐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인지 경찰들에게 쫓기는 꿈을 여러 번 꿨다.

어느 날, 정말 꿈에서처럼 중국 경찰에게 붙잡혔다. 말이 통하지 않았는데 서로 알아듣는 말이라곤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 이름뿐이었다. 나는 “우리는 김정일이 아니다. 노무현이다. 한국으로 가야 한다”고 했더니 그 경찰은 5시에 북한에 전화를 해서 통화가 되면 북한으로 보낼 것이고, 통화가 안 되면 가던 길을 가라고 손짓 발짓으로 일러주었다. 나는 ‘하나님 통화되면 우리는 다시 붙잡혀서 북한에 가야 합니다. 절대로 통화가 되지 않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했다. 중국 경찰은 수화기를 집어 들고 다이얼을 눌렀다. 그 순간 나는 바닥에 무릎까지 꿇고 ‘하나님 제발 이 통화만 안 되게 해 주세요’라며 간절히 기도했다. 결국 전화통화가 되지 않았고 나와 가족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한국으로 발걸음을 계속할 수 있었다.

경찰서에서 나와서 또다시 고개 하나를 넘었는데 더는 걸을 수가 없었다. 중국에서 일할 때 허리를 다쳐서 걸을 때마다 힘겹고 고통스러웠다. 길에 누워서 ‘하나님, 저 이제는 정말 한 걸음도 못 걷겠어요. 하늘길이든 뱃길이든 열어주세요’라고 하나님께 앙탈하듯 기도했다. 그 다음 날 진짜 요란스럽게 지나가는 뱃소리가 들렸다. “야! 배다!” 우리는 정신없이 배를 향해 달렸다. 우리는 그 배를 타고 방콕까지 왔고 그 후 하나님께 기도한 대로 무사히 한국 땅을 밟았다.

녹록지 않은 한국생활에 좌절
한국에 오면 억척같이 일해서 행복하게 살고 마음껏 하나님도 섬기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한국 땅의 현실은 그렇게 녹록지 않았다. 면접 보러 오라고 해서 갔더니 “한국 사람들도 사무직에 들어가기 어려운데 탈북민이 어떻게 사무직 면접을 보러왔느냐”며 대놓고 면박을 주는 사람도 있었다. 아들은 아들대로 학교에서 적응을 못 했다. 탈북민이라면 누구나 이런 설움 저런 설움 안고 살아가는 데다가, 간간이 북한에서 들려오는 소식들은 더욱 잠을 못 이루게 한다. 한국에서는 약 사다 먹으면 금세 고칠 병을 북한에서는 고치지 못해 친지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오지, 또 북한에 있는 언니와 전화 연결을 한 것이 발각 나서 언니가 보위부에 잡혀간 후로 소식이 없다고 하지… 그저 새까맣게 타들어가는 것이 탈북인의 가슴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비로소 깨달아
그러다 작년에 흰돌산수양관에서 열린 탈북인 수련회 때 윤석전 목사님의 설교를 듣게 됐다. 그 자리에서 ‘저 목사님께서 설교하시는 교회 좀 가봤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는데 연세중앙교회를 담임하신다는 얘기를 듣고 찾아오게 되었다.

사실 남편은 엄청나게 술을 많이 마셨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술로 살았다. 남편은 한국에 오면 술을 끊겠다고 약속했지만 지켜지지 않았다. 나는 남편과 자녀 셋이나 있으니 다른 탈북자들에 비해 무척 행복한 편이다. 그러나 남편의 술 중독 때문에 늘 싸움이 그치지 않았다.

올해 2월, 남편이 윤석전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 큰 충격을 받았는지 “이제 술을 끊어야겠다”고 선포했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맹세는 하지도 말라며 면박을 줬다. 그동안 술 끊겠다는 약속과 각서, 맹세를 번번이 어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정말 달랐다. 날마다 윤석전 목사님 설교 테이프를 차에 가지고 다니면서 듣더니 “이렇게 무서운 것을 내가 왜 마시느냐”고 하더니 그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 잔도 마시지 않고 있다. 할렐루야!

나 또한 윤석전 목사님이 설교하시는 말씀이 모두 나에게 하시는 말씀 같아 예배 시간 내내 울다가 온다. 아이들도 연세중앙교회에 오면서부터 예배시간을 얼마나 사모하는지 모른다. 평일에도 교회에 가자고 조를 정도인데 아이들도 그만큼 예배와 교사들의 따스한 보살핌을 통해서 마음의 평안과 위로를 받고 있는 것이다.

뒤돌아보면,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우리 가정에 많은 사랑을 베풀어주셨다. 중국에서 붙잡혀 신의주 감옥에서 풀려날 때도 그랬고, 다시 북한을 탈출해 한국으로 올 때도, 그리고 한국에 와서 4년 만에 남편이 술버릇을 완전히 고치고 우리 가정이 영적인 평안을 찾기까지 하나님께서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너무나도 큰 은혜를 베풀어주셨다. 그간 늘 마음으로 감사하노라 했지만 비로소 지면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간증하며 감사함을 고백한다.

나는 그 누구보다, 그 무엇보다 하나님만이 구세주요, 힘이 되신다는 것을 절대 의심치 않는다. 또 하나님께 기도할 때 꼭 응답으로 이루어질 줄 믿으니 이제 다가올 앞날에 두려움은 없다.

앞으로 간절히 바라는 바가 있다면 내가 만난 하나님을 간증하며 하나님이 이끌어주신 이 귀한 신앙생활에 꼭 승리하고 싶다.

위 글은 교회신문 <209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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