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가산책] 그리스도와 문화
기독교와 타문화의 대립, 지혜롭게 극복할 수 있는 영적 긴장감 필요

등록날짜 [ 2007-09-27 18:17:42 ]


- 문화와 그리스도의 다섯 가지 유형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미국 예일 대학교 기독교 윤리학 교수인 리처드 니버의 1951년에 출판된 ‘그리스도와 문화’에서 그는 그리스도와 문화에 대한 관점을 다섯 가지로 정의하였다. 이 정의는 최소한 그리스도와 문화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최소한의 기준점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첫째, 문화와 대립하는 그리스도(Christ against Culture)이다. 이 유형은 자신이 속해있는 사회의 문화와 관습 자체를 거부하고 배척한다. 문화 자체를 ‘죄’의 산물로 보는 극단적인 입장이다. 둘째, 문화의 그리스도 (Christ of Culture)이다. 문화에 대립하는 유형과 정반대의 개념으로 문화를 선(善)으로 보고 기독교와 문화는 서로 일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셋째, 문화 위의 그리스도 (Christ Above Culture)이다. 그리스도는 문화 위에 군림하며, 복음은 문화가 도달해야 할 이상이라고 생각한다. 넷째, 역설적인 관계에 있는 그리스도와 문화(Christ in Paradox with Culture)이다. 기독교와 문화를 대립구도에 있는 것으로 본다는 점에서 대립유형과 흡사하게 보이기도 하지만, 문화 자체가 존재하는 것은 불가피함을 인정하는 견해이다. 이 유형에서 문화는 ‘필요악’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신앙과 문화 사이에는 항상 역설 또는 긴장이 있음을 인식하는 견해로 천국과 현실의 중간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현실적인 투쟁이 잘 반영된 입장이다. 다섯째, 문화의 변혁자 그리스도(Christ the Transformer of Culture)이다. 문화를 배척의 대상이나 궁극적 지향점이 아닌 변혁의 대상으로 보고 주로 인내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세계 속에서 변혁을 시도한다는 특징이 있다. 아마 대부분의 기독교인이 이 다섯 가지 유형 중에서 첫째 혹은 셋째에 해당될 것이며, 다섯째 문화의 변혁자 그리스도는 가장 이상적인 모델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이 유형이 그리스도와 문화에 대한 해답은 아니다.


- 대립과 갈등을 초월하는 길

문화와 기독교의 갈등과 대립은 예수 그리스도에서 시작된다. 당시 예수님의 가르침이 유대문화와 로마의 문화와 대립하였기 때문이다. 예수의 가르침은 현세의 생활을 멸시하고 영생불멸에만 열중하며 하나님의 은혜에만 의존하게 함으로써 인간 자신이 무엇인가를 성취하려는 로마의 진취적 기상과는 문화적으로 맞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로마가 취한 타 종교에 대한 관용적인 태도와는 반대로 하나님 외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않는다는 기독교인들의 유일신 사상은 기독교가 더욱 박해를 당하는 원인이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 이후로 복음이 들어간 모든 세계의 문화 속에서 기독교는 항상 박해와 배척의 대상이었다. 특히, 공산주의자들이 그토록 극렬하게 기독교인들을 박해했던 이유도 바로 그들이 지향하는 혁명과 투쟁노선에 기독교는 방해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역사상 기독교와 타 문화와의 대립은 그 양상이 사상, 신조, 윤리에 관한 것이었다 할지라도 본질적으로는 '그리스도와 문화’의 양극 사이에서 움직이는 문제였다. 또한, 이 문제는 지금까지 있었고 또 앞으로도 계속 이어지는 난제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대립과 긴장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 자체가 타락한 문화와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속의 문화가 공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공존이라기보다는 전투에 가까운 영적 대립이 정확한 표현이다. 그러므로 그 긴장과 갈등을 지혜롭게 풀어가는 방법이 쉽지만은 않다. 더욱이 최근 들어 시대 전반에 흐르는 공익과 화합, 다양성의 인정이라는 핑계로 기독교의 절대적인 진리체계들을 파괴하는 다원주의(多元主義) 문화의 영향으로 이제는 누가 적군인지 아군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는 혼돈상황으로 변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나마 가지고 있던 대립과 긴장의 감각 자체가 완전히 마비되어가고 있는 듯하다. 추석을 앞두고 또다시 전통문화와 첨예한 대립이 불가피한 상황에 놓여있다. 대립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시대 속에서 진검승부가 어리석고 무모해 보일지도 모른다.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한(마 10:16) 모습이 진흙탕과 같은 혼돈의 시대의 적절한 전투자세일 것이다.

위 글은 교회신문 <119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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