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가산책]철학박사 김석 교수와 함께 떠나는 유럽여행
기독교의 유럽정착 ① - 카놋사의 굴욕과 절대적 교황권의 성립

등록날짜 [ 2009-11-17 16:18:31 ]

고대 로마제국의 본토 이탈리아에는 기독교와 관련된 많은 역사 유적이 있다. 특히 바울의 마지막 숨결이 배어있는 로마는 기독교 수난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인데 오늘날은 교황청 때문에 가톨릭교회를 상징하는 또 다른 이름이 되었다. 그런데 엄밀히 말하면 교황청은 로마 북서부에 위치한 면적 0.44 ㎢의 초미니 공화국 바티칸시국에 있으며 교황은 여기서 모든 세속 권력의 간섭 없이 초월적 지위를 누리며 전 세계 가톨릭교회를 이끈다. 바티칸 공국의 특별한 지위는 1929년 이탈리아 정부와 교황청이 맺은 라테란 협정에 의해 보장되었는데 그 전까지는 교황청과 세속의 권력이 계속해서 충돌했다. 이제 절대적 교황권이 확립되는 과정에서 벌어진 두 가지 사건을 중심으로 중세 기독교의 성립과정을 훑어보자.

세계 최초로 대학이 설립된 이탈리 중북부의 도시 볼로냐와, 스파게티에 곁들여 먹는 분말형 파르메산 치즈가 유명한 파르마의 중간 지역에 레지오 넬 에밀리아라는 작은 도시가 있다. 이 도시 남쪽 산등성이에 지금은 앙상히 벽의 일부와 골조만 남은 낡은 성채가 있다. 여기가 1077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던 하인리히 4세가 추운 겨울에 3일 동안을 교황에게 빌어 용서를 받았다는 ‘카놋사의 굴욕’이 발생한 역사적 현장이다. 이 사건 이후로 점차로 교황권이 강력해지면서 권력의 간섭에서 벗어나 중세 유럽인들의 삶에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황제가 교황의 발아래 무릎을 꿇고 자비를 구했던 사건으로 교과서에 짧게 소개되지만 사건의 내막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카놋사의 굴욕’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세속의 권력이 더 우세하였는데 봉건 제후들과 황제는 교회에 토지를 빌려주면서 재정적 자립을 돕는 대신 주요 성직자들을 임명하는 서임권을 행사하였다. 세속의 권력이 교회에 개입하면서 성직자들은 교회보다 통치자의 눈치를 더 볼 수밖에 없었고 고위 성직자의 자리가 매매되거나 성직자가 정치적 이해를 중시하면서 타락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새로 교황이 된 그레고리 7세는 교회개혁 운동을 강력히 전개하는데 그 핵심은 세속적 권력, 특히 황제가 행사하던 성직자 임명권을 찾아오고, 교황을 중심으로 유럽을 정치적으로 통일하는 것이었다. 그레고리 7세는 철두철미한 원칙주의자였으며 교회를 더 우위에 놓고 신앙심을 기초로 사람들을 이끌려는 신념이 강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운동은 교황 못지않게 정치적 야심이 강했던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의 왕권강화 운동과 충돌한다. 교황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황제는 독일과 이탈리아 북부 주교들을 소집한 교회회의를 열어 교황을 사이비 교주라고 공격한다. 이에 그레고리 7세는 하인리히 4세를 파문하고 황제의 영향 하에 있는 모든 독일 국민에게 교회의 뜻을 받들어 황제를 추방하라고 명령한다.
처음에는 황제가 사태를 주도하는 것 같았지만 이후 황제를 견제하면서 독립적인 지위를 누리고자 했던 제후들이 교황과 손을 잡고 새 황제 추대를 모색하면서 사태가 반전된다. 위기의식을 느낀 황제는 왕비와 어린 아들을 대동한 채 눈 덮인 라인 강을 건너 당시 카놋사 성에 머물던 교황을 찾아온다. 그레고리 7세는 황제가 추운 날씨에 맨발로 3일 동안 간청하는 것을 보고 탕아를 받아들이는 마음으로 황제를 용서하는데 이것이 유명한 ‘카놋사의 굴욕’이다. 굴욕을 당했지만 정치적으로 소생한 황제는 이후 세력을 키워 제후들을 제압한 후 1080년 다시 종교회의를 소집하여 새 교황인 클레멘트 3세를 선출한다. 새 교황을 선출한 후 1081년 알프스를 넘어 로마로 쳐들어가 로마를 함락시킨다. 신변보호를 위해 그레고리 7세는 로마를 탈출하여 1085년까지 남부이탈리아에서 망명자처럼 살다가 쓸쓸히 죽는다. 황제는 비록 교황의 파문을 취소시키기 위해 추위와 모멸감을 감수하면서 빌었지만 마음으로는 교황에게 승복하지 않고 끝내 복수를 한 것이다. 강력한 교황권의 신봉자 그레고리 7세는 황제에 의해 쫓겨났지만 황제 역시 나중에 자식의 반란으로 구금되는 시련을 겪는다.

위 글은 교회신문 <171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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