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가산책]십자군 전쟁과 아비뇽 유수
철학박사 김석 교수와 함께 떠나는 유럽여행-기독교의 유럽정착②

등록날짜 [ 2010-02-22 16:19:26 ]

교황권 절대화 등 이해관계 얽히며 전쟁 발발
전쟁 초기 순수한 동기 벗어나며 점차 세속화

남으로 지중해 동으로는 이탈리아와 접해 있는 프랑스 프로방스 지역은 산악지형의 소박한 아름다움과 여러 문명의 흔적이 곳곳에 배인 유서 깊은 곳이다.

니스, 칸, 마르세유 등 유명한 도시들이 프로방스에 있는데 그중에서도 세계 3대 연극제의 하나가 열리는 아비뇽을 빼놓을 수 없다. 매년 7월 약 3주간 펼쳐지는 국제 연극제는 다양한 장르의 연극, 발레, 마임, 즉석 연주회, 거리 공연, 연극관련 만남 등 풍성한 볼거리로 많은 관광객을 끈다.

연극제가 열리는 주요 무대이며, 그 자체가 아비뇽을 대표하는 것이 바로 교황청이다. 교황청 하면 즉시 바티칸을 떠올리지만 1309년부터 1377년까지 68년 동안 7명의 교황이 아비뇽에서 권좌를 계승하면서 로마를 대신했다. 이 기간에 교황권은 사실상 프랑스 왕의 보호와 간섭 아래 놓인 채 점차 위축되고 나중에는 두 명의 교황이 난립하기도 한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그것은 교황권이 절대화되면서 벌어진 십자군 전쟁과 관계가 깊다.


<사진설명>당시 십자군 전쟁을 묘사한 그림.

십자군 전쟁의 발생
카놋사의 굴욕에서 보았듯이 교회와 세속의 정치권력은 항상 긴장 관계에 있었지만 교황은 점차 황제와 봉건 영주들을 굴복시키면서 이제 유럽인들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초월적 존재가 된다. 이런 와중에 기독교의 영향 아래 있던 동유럽과 소아시아 지역이 이슬람 세력에 의해 점령되고, 북아프리카와 스페인까지 이슬람의 지배하에 놓이자 유럽인들의 불안감이 커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11세기 중엽 이슬람 왕조인 셀주크 투르크족이 예루살렘을 포함한 옛 기독교 성지를 점령하고 순례자들을 박해하자 마침내 교황 우르바노 2세는 성지탈환을 위해 십자군 원정을 선언한다. 교황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성전(聖戰)을 호소하고, 여기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모든 죄를 사하는 전대사(全大赦)를 주겠다고 하자 전 유럽은 전쟁 열기로 들끓는다.
기사와 영주 같은 전사 집단은 물론 평범한 농민, 심지어 어린아이와 여자들까지 전쟁에 참여하려고 하였다. 십자군 전쟁은 한 번이 아니라 11세기부터 13세기까지 총 8차례에 걸쳐 진행되면서 다양하게 전개된다.

신을 위해 순교하려는 신앙심뿐 아니라 다양한 이해관계가 얽히면서 전쟁은 초기의 순수한 동기를 벗어나 황금의 땅 엘도라도를 찾아 떠나는 모험처럼 전개된다. 교황은 군사 원정을 주도하면서 교회의 우위를 확실히 하고 황제와 제후들을 군사적으로도 통제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 또한 성지회복 전쟁을 통해 로마 가톨릭의 영향에서 벗어난 동로마제국에 실질적 영향권을 행세하고자 하였다. 영주들과 기사들은 새로운 영지를 획득하고 전쟁을 통해 자신들의 존재감을 과시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

상인들은 유럽이라는 좁은 시장을 벗어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면서 부를 축적하고자 했고, 평범한 농민들은 신분 상승을 위한 새로운 기회를 잡으려고 했다. 모두가 한몫 잡으려는 꿈에 부푼 채 겉으로는 신앙심 때문에 전쟁에 참여하는 것처럼 위선되게 행동한 것이다.

이렇듯 세속적인 야심과 이기적 욕망이 개입된 십자군 전쟁이 순수한 방향으로 진행되기에는 애초부터 한계가 많았다. 전쟁을 통해 몇 차례 예루살렘이나 소아시아의 일부 지역을 점령하고 기독교 국가를 일시적으로 세우기도 했지만 십자군 전쟁은 결국 여러 부작용만 낳은 채 원래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 실패하면서 오히려 중세를 무너뜨리는 데 일조한다.


<사진설명>프랑스 아비뇽 교황청. 1309∼1377년까지 7대에 걸쳐 로마에서 피신해 온 교황이 아비뇽에서 체류한 곳.

십자군 전쟁의 후유증과 교황권의 몰락
성지회복의 대의와 순수한 신앙의 열정을 내세웠지만 세속적 동기가 더 많이 작용한 십자군 전쟁은 여러 가지 문제를 낳았고 많은 학살과 범죄로 유럽을 혼란에 빠뜨린다. 예를 들어 체계적으로 조직된 십자군 원정이 시작되기 전에 먼저 예루살렘을 향해 출발한 군중 십자군을 들 수 있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떠난 이들은 동쪽으로 향하면서 곳곳에서 약탈과 살인, 방화 등 난동을 부리면서 말썽을 부리다가 셀주크 투르크의 정규군에게 대패하면서 전멸한다. 이들은 십자군이기보다 도적떼처럼 행동했다. 4차 십자군 전쟁 때는 베네치아 상인들의 선동에 속아 같은 기독교 국가인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키고 약탈과 학살을 자행하기도 하였다. 십자군 전쟁이 군사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사분오열 되면서 예루살렘의 지배권은 이슬람세력에 완전히 넘어간다.

십자군 전쟁이 실패로 끝나자 이를 주도했던 교황의 권위가 급속히 몰락하는데, 그 상징적 사건이 바로 아나니 사건이다.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가 전비충당을 위해 교회에 세금을 부과하자 교황이 반발하였고, 이에 국왕은 교황의 별궁인 아나니를 습격하고 교황을 납치한 후 퇴위를 강요하였다. 나중에 교황은 풀려났지만 곧 죽게 되고, 그 후 프랑스 국왕의 간섭하에 새로운 교황인 클리멘스 5세가 선출되었다.

클리멘스 5세는 프랑스 국왕의 요청에 따라 로마로 돌아가지 않고 아비뇽에 새롭게 교황청을 만들면서 가톨릭은 프랑스 국왕의 보호 아래 놓이게 된다. 이것을 고대 유대인들이 바빌론으로 끌려간 사건에 빗대어 ‘아비뇽 유수’라고 부른다. 지금도 웅장하게 서 있는 아비뇽 교황청은 신앙이 본래의 순수성을 잃어버리고 세속적 동기에 오염될 때 어떤 결과가 발생하는지를 말 없이 증언한다.

위 글은 교회신문 <181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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