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가산책] 미국인 선교사 ‘애니 베어드’, 찬송가 한글 번안 등 죽기까지 선교 사역
조선을 사랑한 푸른 눈의 선교사 ‘안애리’

등록날짜 [ 2019-05-14 17:21:20 ]


애니 베어드 선교사와 남편인 윌리엄 베어드 선교사. 애니 선교사는 25년 동안 조선의 부산과 평양에서 선교하면서 찬송가를 번역·번안했다.


찬송가 440<멀리 멀리 갔더니>

첫딸 잃은 비통함 이기며 쓴 찬송시

찬송가 337<인애하신 구세주여>

411<예수 사랑하심은>도 번안

남편과 숭실대 전신 숭실학당 설립


애니 베어드(Annie Laurie Adams Baird, 한국 이름 안애리(安愛理), 1864~1916)는 찬송가를 즐겨 부르던 어머니에게 영향받아 작사가의 꿈을 키웠다. 미국 인디애나 마리온에서 열린 여름성경학교에 참가한 애니는 기네스 목사(Gratta Guiness)의 설교 말씀을 듣고 선교사가 되라는 비전도 받았다.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16:15)는 말씀이 애니의 인생을 이끌었다. 대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무디(D. L. Moody, 1837~1899)를 비롯한 여러 지도자에게 가르침을 받아 예비 선교사로서의 역량을 넓혔다.

 

27세부터 남편과 부산·평양에서 선교

애니는 1890년에 선교사 비전을 가진 윌리엄 베어드(William M. Baird, 한국 이름 배위량, 1862~1931)와 결혼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891년부터 미국 북장로교회 선교사로서 조선 부산에 파송돼 선교 사역을 시작했다. 베어드 부부는 자기 집 사랑방을 선교사의 주일예배 장소로 사용하게 했고, 그 밖에도 전도 준비, 서적 번역, 성경 공부, 서당 교육 등 선교 활동을 하도록 장소로 내놓았다. 이 사랑방은 부산에서 탄생한 첫번째 교회인 초량교회의 모태가 됐다. 애니는 남편의 목회 사역을 돕고 한국 청년들, 특히 여성들을 가르치는 일에 힘썼다.


남편 윌리엄이 경상도 지역으로 전도 여행을 떠난 동안 애니는 안타깝게도 첫딸 로즈를 뇌척수막염 탓에 잃었다. 아이를 잃은 지 나흘 후, 애니는 어머니에게 편지를 보냈다. “513일 주일, 아이가 보통 잠자리에 들던 그 시간에 저희 곁을 떠났습니다. 어머니가 짜주신 조그만 흰옷을 입히고 새 신발을 신겼습니다. 무덤을 넘어서는 천국 소망을 갖지 못한다면 어떻게 이런 어려운 순간들을 살아나갈 수 있을까요. 주신 이도 하나님이요, 데려가신 이도 하나님이며, 이제 아기의 영혼은 영화롭게 돼 주와 함께 있으니 감사합니다.” 그녀는 비통함과 외로움을 이기며 찬송시를 썼다. 당시 작사한 찬송시가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 한국교회에서 애창되는 찬송가 440<멀리 멀리 갔더니>.(QR코드 참조)

 

1.

멀리 멀리 갔더니 처량하고 곤하며

슬프고 또 외로와 정처 없이 다니니

 

2.

예수 예수 내 주여 섭섭하여 울 때에

눈물 씻어주시고 나를 위로하소서

 

3.

다니다가 쉴 때에 쓸쓸한 곳 만나도

홀로 있게 마시고 주여 보호하소서

 

(후렴)

예수 예수 내 주여 지금 내게 오셔서

떠나가지 마시고 길이 함께하소서


52세 암으로 죽기까지 조선 사랑

부산 사역을 마친 애니는 평양으로 이주해 교육 사역에 전념했다. 베어드 부부는 평양에서 모든 교육은 한국어로 해야하고 모든 교재는 한국어로 인쇄된 것이어야 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숭실대학교 전신인 숭실학당(초대 학장 배위량)을 세웠다. 또 숭의여자학교와 선교사 자녀들이 다닐 외국인학교의 기초를 다졌다. 애니는 동물학·식물학·물리학 등 자연과학 교재를 여러 권 출간했다. 또 조선을 배경으로 한 선교문학인 한국의 새벽, 고영규전을 저술해 선교 본부의 큰 관심을 끌었다.



특히 애니는 언어재능이 탁월해 한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그녀가 번안한 찬송가는 100년이 지난 지금도 거의 그대로 부를 정도로 한국어 운문체를 잘 구사한 선교사였다. 찬송가 337<인애하신 구세주여>, 411<예수 사랑하심은>이 그녀가 번안한 대표 찬송가다. 가사에서 애니의 언어감각과 조선 문화를 이해하고 존중한 배려심을 느낄 수 있다.


1908, 선교 사역에 분주하던 애니는 암이 발병했다. 그녀는 미국으로 건너가 치료받았지만, 조선에 돌아와 사역하던 중에 암이 재발했다. 가족의 만류에도 그녀는 나의 죽음 탓에 남편이 선교지를 비우면 안 되므로 조선에 계속 남아있겠다고 해 평양에서 19166952세를 일기로 소천했다.


애니는 죽기 전 마지막 일기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 긴 싸움이 끝나고 조금 후엔 내게 날개가 달리리라. 하나님의 방법은 언제나 나에게 좋았다. 이제 시간이나 힘이나 능력이나 성별(性別)의 제약이 없는 곳에서 주님을 영원히 즐겁게 섬기기를 고대한다. 아마도 하나님께서는 이곳보다 그곳에서 안애리가 조선인을 위해서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이 일하게 하실 것이다.”

/김찬미 기자

위 글은 교회신문 <624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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