有限者의 고백

등록날짜 [ 2006-08-01 14:41:26 ]


의 값이 나타내는 의미가 무엇일까. 고등학생 시절 깊이 생각하곤 했던 문제이다. 위 수식의 교과서상 해는 다름 아닌 -∞와 +∞이다. 위 식에서 x가 어느 쪽에서든 π/2로 접근하는데 왜 그 결과가 완전히 달라질까? 무한한 평면을 가정한다면 어디엔가 무한히 진행된 곳에서는 -∞와 +∞의 접점이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무척이나 궁금했다.
그 뒤로도 이어진 영원과 무한에 대한 나의 관심은 대학시절 천체관측을 통해 증폭되었다. 관측소에서 천체망원경으로 목성을 보고 있었는데, 목성이 움직이고 있는 것(정확히 말하면 지구가 자전하고 있는 것) 아닌가! 광활한 우주 공간, 그 안에서 운행하고 있는 천체들....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경이로움에 압도되었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지나 예수를 믿게 된 후 성경을 통해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신 역사와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하여 알게 되었을 때, 영원과 무한에 대한 그 동안의 열망은 차원 높은 만족-하나님의 영원한 빛을 보게 된 희열-을 얻게 되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전도서 3장 11절).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무한을 인식할 수 있을까. 인간의 사고가 감각적이고 유형적인 틀에 기초하고 있는 한 인간은 무한을 인식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무한이 인간의 인식 속에 들어오는 순간 유한한 것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역사에 비추어 보면, 근대과학의 기초가 된 뉴턴 역학의 특징은 결정론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운동방정식의 초기 조건이 주어지면 그 이후의 운동은 일률적으로 결정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뉴턴 역학은 수학적 계산에 의하여 당시 미지의 태양계 행성이었던 해왕성의 존재를 예측하였을 만큼 놀라운 것이었으며, 이에 기초하여 자연은 일정한 법칙에 따라 운동하는 거대한 기계라는 기계적 세계관이 자리잡게 되었고(이와 같은 기계적 세계관에 의하면 하나님은 우주의 초기 조건만을 부여할 수 있을 뿐 자동으로 움직여가는 역사에 관여할 수 없는 국외자가 된다). 이후 자연을 단순하고 아름다운 수학적 원리로 기술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인간의 이성에 대한 절대적 신뢰가 유지되었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와 수학에서 비유클리드 기하학이 발전하고 괴델의 불완전성정리로 수학적 증명의 한계-무모순체계 내에서 증명불가능한 진리들이 존재한다-가 드러나게 되었으며, 물리학에서는 양자역학이론이 기틀을 잡게 되면서 위와 같은 기계적 세계관은 흔들리게 된다. 무엇보다도 인간의 우주에 대한 근본적 이해가 그리 단순명료하게 이루어질 수 없고, 인간의 이성을 초월하는 무엇이 있어 진리는 이성보다 클 수밖에 없다는 이성의 한계를 깨닫게 되었다.
사람들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영원을 사모하도록 되어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뜻을 어디까지 알 수 있을까. 분명 하나님은 우리 인식의 한계를 초월하신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하나님은 성령으로 하여금 우리에게 하나님의 무한한 진리를 보여 주신다. 유한한 피조물에 불과한 우리가 믿음으로 무한하신 하나님과 천국에서 영원히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은혜가 아닌가!

위 글은 교회신문 <91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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