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대곤 목사 칼럼] 하나님을 만난 행복
고린도전서 강해④-中

등록날짜 [ 2023-01-10 11:26:38 ]

세상 모든 것은 파멸만 자초할 뿐

우리에게 진짜 행복을 주지 못해

하나님만이 참 행복 주실 수 있어

고린도전서 강해④-中 


지식이 쌓이면 신념이 만들어지고, 신념은 굳어지면 고정관념이 되어 진실을 만나도 무시하거나 외면해 버립니다. 따라서 어떤 지식을 갖느냐가 무척 중요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육신이 잘되는 지식이 아니라, 영원히 사는 영혼의 때를 위한 지식을 우선해야 합니다. 


이 세상 권세자 사단 마귀 역사는 돈, 명예, 세상 방법으로 이 땅에서 70~80년 동안 행복하게 사는 것이 제일이라고 속입니다. 결국 사단 마귀 역사는 우리가 육신의 생각으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게 미혹해 우리의 영혼을 지옥으로 끌고 갑니다.


성경 전체는 육신의 생각을 가지고 사는 모든 사람이 결국 하나님의 심판 앞에 멸망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창세기의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타락했고, 노아 시대의 사람들이 죄악이 관영하여 홍수로 심판받았으며, 심판 후에도 바벨탑을 쌓아 하나님을 도전했습니다. 


창세기 3장에서 악한 사단 마귀 역사는 아담과 하와에게 나타나 하나님 말씀을 경홀히 여기도록 속이고, 결국 가치 판단의 기준이 육신이 되어 선악과를 먹게 합니다. 육적인 기준으로 보니까 이전까지 눈에 들어오지 않던 것이 갑자기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게 보이며 탐욕이 생긴 것입니다. 악한 마귀는 육신의 정욕을 이용해 무가치한 것들을 탐스럽게 보이도록 하면서 인간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무시하게 합니다. 


창세기 4장에 나오는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제사를 드립니다. 가인은 육신의 눈으로 봤을 때 자신에게 가치 있는, 땀 흘려 농사지은 것을 하나님께 바칩니다. ‘내가 이만큼 노력했으니까 하나님이 알아줘야 하지 않겠습니까’라며 하나님께 소중히 여기는 것을 드리면 인정받을 줄 알았으나 하나님께서는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았습니다.


반면 아벨은 육신의 생각으로 더 크고 귀한 것을 드리기보다, 가치 없어 보이는 어린 양의 피와 기름을 드렸습니다. 자신의 자랑을 드린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 앞에 이렇게 양처럼 죽어야 하는, 하나님이 나를 불쌍히 여겨줘야만 살 수 있는 존재라고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제사를 드리자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를 받아 주신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내 판단과 내 지식으로 하나님 앞에 정성을 드리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육신의 생각에 사로잡힌 사람은 하나님의 음성을 무시하는 자입니다. 


결국 가인은 하나님 앞에 인정받지 못했다고 분을 내어 동생을 죽였습니다. 동생을 죽인 다음에 자기도 죽임을 당할 것 같아 두려워하니까 하나님께서 가인을 불쌍히 여겨주셔서 ‘너를 지켜주겠다’라는 증표를 주십니다(창4:15). 


이때 가인이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해 주시는구나’라고 돌이켜야 하는데, 하나님을 믿지 못하니까 육신의 생각으로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성(城)을 쌓습니다(창4:17). 우리도 가인처럼 하나님을 믿지 못하니까 이 땅에서 돈의 성을 쌓고, 인맥의 성을 쌓고, 보험의 성을 쌓으며 자신을 지켜보겠다고 아등바등합니다. 하나님이 책임져 주겠다는데도 육신의 생각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을 부정하게 만듭니다.


하나님께서 지켜주신다는 약속을 불신하면서 자기 생각대로 성을 쌓은 결과, 가인의 후손들도 육신의 생각으로 살면서 과학과 문명을 발전시킵니다. 가인의 자손인 라멕에게 아들 셋이 있었는데 하나는 육축을 치는 자, 하나는 수금과 퉁소를 하는 자, 또 하나는 동철로 날카로운 기계를 만드는 자가 됩니다(창4:20~22). 


하나님을 무시한 결과는 멸망뿐

인간이 잘살아 보겠다고 발전시킨 과학문명과 문화들은 영적인 것을 생각하지 못하게 하고 육신의 즐거움만 좇게 합니다. 오래 살아보겠다고 과학기술을 통해 유전자를 조작하고 바이러스를 정복하겠다고 하나 코로나와 같은 것들을 만들어내고, 자신을 지켜보겠다고 만든 전쟁 무기들은 점점 발전해 수많은 사람을 죽입니다. 행복하고 즐거워 보겠다고 발전시킨 문화도 쾌락의 문화가 되어 세상의 타락이 극에 달하고 있습니다. 물질문명이 이만큼 발전했는데도 지금 세상에는 왜 이렇게 가난한 사람이 많고 왜 이렇게 기근이 많을까요.


이 땅에서 인간의 생각으로 내 자신을 지켜보겠다고 하나님을 무시한 결과가 이전에도 있었으니 바로 노아 홍수의 사건입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창6:5~6). 하나님의 생각이 아니라 육신의 생각으로 자신의 인생을 경영하고 모든 것을 만들어 보겠다는 결과가 세상에 죄악이 관영하고 그 마음의 생각과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하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홍수로 심판해야겠다는 하나님의 한탄까지 가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이미 구약의 말씀을 통해 육신의 생각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 하나님을 도전한 결과는 심판밖에 남지 않는다는 것을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날도 하나님 말씀을 인간의 지식으로 이런 저런 관점에서 보며 학문화시켜서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지식의 수단으로 만듭니다. 하나님 말씀은 능력이고 생명인데, 학문화가 되면서 결국 철학이나 경제학 같은 다른 학문과 같은 선상에서 취급당하며 하나님 말씀을 등한히 여기고 거부하게 만듭니다. 하나님 말씀이 주가 되는 것이 아니라 신학의 거장이라는 불트만, 칼바르트가 주장한 것, 신학의 초석을 놓았다는 알미니안, 칼빈이 말한 것들이 주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부정하면서 내 생각을 그 위에 놓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 사람들도 하나님의 복음을 들었으면서도 그 복음을 다시 육신의 생각으로 바꿔버리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고린도교회 사람들이 “바울이 이렇게 말했다더라”라고 바울을 대단하게 보지만 바울을 쓰신 하나님이 대단한 것이고, “베드로에게 침례 받았다”라며 베드로를 대단하게 여기지만 베드로를 쓰신 하나님이 대단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가 대단하고 위대한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지식과 하나님의 지식 중 어떤 것을 우선해야 할지를 바로 알고 분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782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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