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대곤 목사 칼럼] 예수님의 깊은 탄식
마가복음 강해(19)

등록날짜 [ 2023-11-21 22:42:12 ]

하나님 말씀을 아무리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이들 바라보며

예수님께서 애타게 탄식하셔

예수께서는 ‘죄 사함’의 복음

주시며 영적 장애 고쳐 주셔


마가복음 강해(19)

이방인 지역인 두로에서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을 고치신 예수께서 같은 베니게(페니키아) 지방에 속한 시돈과 데가볼리 지역을 거쳐 전도 활동의 주 무대인 갈릴리에 이르셨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귀먹고 어눌한 자를 예수께 데리고 와서 안수해 주시기를 간구합니다(막7:31~32). 예수께서는 귀먹고 어눌한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서 한적한 곳으로 가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땅에 죄 사함의 복음을 전하러 오셨는데 사람들이 자꾸 병만 고쳐 달라고 모여드니까, 병든 자가 불쌍해서 고쳐 주기는 하지만 드러내 놓고 병을 고치려 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다른 치유 사역에서 볼 수 없는 매우 독특한 행동을 하십니다. 그 사람의 양 귀에 손가락을 넣고 그의 혀에는 침을 뱉은 손을 대셨습니다. 귀를 뚫는 상징으로 손가락을 양 귀에 넣으시고, 혀를 푸는 상징으로 손을 혀에 대신 것입니다. 아마도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그가 주님의 사랑을 몸으로 직접 느낄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막7:34).


그리고 예수께서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십니다. 주님의 탄식하시는 모습에서 주께서 이 한 사람에게 얼마나 큰 관심과 사랑을 갖고 계신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탄식하시며’는 어원적으로 ‘매우 답답한 상태에 있다’는 뜻인데, 사람의 심정을 답답하게 하는 요소에 심적으로 크게 압박받는 상태(롬8:23)를 나타냅니다. 또 여기에서 사용된 ‘탄식’이라는 단어는 단순한 동정에서 나오는 수준이 아닌 ‘깊은 탄식’(deep sigh)을 이릅니다. 주님은 이 사람의 고통을 온몸으로 함께 느끼고 계셨습니다.


예수께서 행하신 ‘죄 사함’의 치유

주님의 탄식은 어찌 보면 우리 인간을 향한 탄식입니다. 아무리 하나님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탄식하신 것입니다. 그 탄식하시는 내용이 마가복음 8장부터 10장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를 고쳐 주고 싶은 답답하고 애타는 주님의 목소리가 바로 ‘에바다’입니다.


예수께서 그를 향하여 “에바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에바다(Ephphatha)’는 ‘너는 열리라’라는 의미입니다. 일차적으로 귀가 열리고, 그 다음으로 혀의 맺힌 것이 풀리는(막7:35) 것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답답하게 하는 이 사람의 전체적인 문제가 해결되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께서는 귀먹고 어눌한, 듣지 못하고 제대로 표현하지도 못하는 사람을 고쳐 귀가 열려 듣고 혀의 맺힌 것이 풀려 분명하게 말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진짜 고쳐 주고 싶어 한 이들은 하나님 말씀을 제대로 듣지 못하고 하나님 앞에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죄 가운데 있는 세상 사람들은 비록 육적으로는 정상일지라도 영적으로는 장애인입니다. 눈이 있어도 천국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복음을 듣지 못하고, 복음에 올바로 반응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입에서는 거친 세상 소리가 나올지라도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찬양과 기도는 더더욱 나오지 못합니다. 영적인 소경이요, 귀머거리요, 벙어리인 것입니다. 귀먹고 어눌한 자를 데리고 와서 고쳐 주기를 간구한 사람들처럼 우리도 눈과 귀가 막히고 혀와 마음이 굳은 사람들을 주님께 데리고 나와 고침받도록 해야 합니다.


“그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때에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사35:5~6).


이사야 선지자는 메시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이런 일을 행하실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그 예언대로 예수께서는 우리를 고쳐 주러 오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고쳐 주심을 ‘죄 사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막4:12). 겉으로는 육신의 병을 고쳐 주신 것처럼 보이지만 예수께서는 하나님과 막힌 죄 문제, 곧 우리의 영적인 장애를 해결해 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제대로 듣지 못하고, 하나님 앞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온전히 고백하지도 못하는 우리를 고쳐 주신 것입니다.


7장 앞부분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듣지 못했고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습니다. 말로는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하면서 마음으로는 멀고, 사람의 유전을 지킨다고 하면서 오히려 하나님의 계명을 저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영적으로 거룩해지라고 당부하시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오해해 겉모습만 거룩해지려고 하면서 자신의 의를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심정을 제대로 알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 제대로 말을 했습니까? 수로보니게 여인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이방인이었지만, 그 심정은 주님께 긍휼을 얻을 자로서 자신의 권리 없음을 인정하면서 긍휼을 구했습니다. 이 간구가 바로 모든 인류가 하나님 앞에서 분명하게 표현해야 할 반응입니다. 죄 때문에 지옥 형벌을 피할 수 없는 우리의 불쌍한 사정을 들고 죄 사함받기를 간구하며 주님께 나와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귀먹고 어눌한 자를 고치시는 사건을 통해 “이처럼 듣지 못하고, 반응하지 못하는 너희가 하나님 말씀을 제대로 듣고 제대로 말하도록 고쳐 주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이 7장의 내용입니다. 어떻게 고침을 받습니까? 죄 사함, 바로 회개를 통해서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맞습니다,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하나님 앞에 죄를 들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장로들의 유전을 만들어 가며 “나는 깨끗해, 의로워, 거룩해”라고 겉으로 드러나는 의를 주장했습니다. 반면에 “너는 죄인이야. 하나님의 나라, 천국이 오면 심판의 대상이 되니 죄 사함받기 위해 하나님 앞에 살려 달라고 회개해”라며 상한 심령으로 하나님 앞에 나오라는 것이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이고, 예수께서 오셔서 가르쳐 주신 복음입니다. 마가가 전하는 하나님의 목소리를 올바로 듣고 올바로 반응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위 글은 교회신문 <825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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