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론과 훌] 교회 내 익명성을 극복해야 한다

등록날짜 [ 2014-04-15 16:30:47 ]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로 묶여 있는 지체
가벼운 관심과 인사부터 나누고 실천하는 삶 살자

우리 교회처럼 규모가 큰 교회에 다니다 보면 교인들끼리 서로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특정 기관에서 활동하거나 일을 함께하지 않으면 오랫동안 같은 교회에 다니고 바로 옆자리에 앉거나 자주 마주쳐도 서로 무관심하기 쉽다.
 
마치 현대 도시인들이 익명성의 그늘에 숨어 적당히 거리를 두고 자기만의 프라이버시를 지키려고 하는 것처럼 교회에서도 익명성이 점점 커지고 있다. 이러다 보면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라는 동질감은커녕 전혀 상관없는 제3자처럼 대하는 경향이 굳어진다.

약 한 달 전 필자가 겪은 웃지 못할 에피소드가 있다. 평소 전철을 자주 이용하는데 그날도 귀갓길에 2호선을 타 자리에 앉아 책을 보고 있었다. 합정역 근처에 왔을 때 옆에 앉아 있던 아주머니가 갑자기 “저기요 아저씨, 하나님 믿고 구원 받으세요”라고 말을 걸어 왔다. 갑작스러운 일이라 멍하니 있었는데 이분은 필자의 얼굴을 유심히 보더니 근심이 많아 보인다며 자신은 연세중앙교회 교인인데 꼭 교회에 나오라고 말하고는 답변할 틈도 없이 전철에서 내렸다.

순간적으로 벌어진 일이지만 집에 오는 내내 생각이 많았다. 필자를 전혀 알지 못하는 것은 당연할 수 있고 열심히 전도하다 보면 상대방 말을 제대로 못 들을 수도 있는 일이기에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는 일이다.

그러면서 생각해 보니, 함께 신앙을 나눈다면서도 형식적으로 예배만 드린 후 서둘러 집으로 가 버린다거나, 얼굴을 잘 알아도 간단한 눈인사 정도나 악수만 하는 사이가 되지는 않았나 뒤돌아보았다.

미국 사회학자 어빙 고프먼은 현대 도시생활을 지탱하는 미덕을 ‘예의 바른 무관심’이라고 불렀다. 예컨대 전철 안에서 누가 전화통화를 해도 못 들은 척하고 다른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해도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은 채 서로 존중(?)하는 것이 도시인들의 생활방식이라는 것이다.

‘예의 바른 무관심’은 현대인의 강박적 태도를 잘 보여 주지만 이런 양식이 일상에 젖으면 이웃의 불행이나 고통도 외면하고 나중에는 공동체 관계 자체를 훼손할 수 있다.

최근에 죽은 지 한참 지난 노인 유골이 발견되었다든지, 이웃에 범죄나 안 좋은 일이 벌어져도 전혀 도와주지 않는 몰인정한 일들이 심심찮게 보도되곤 한다.

대형 교회들도 이런 도시화 현상과 비슷한 일이 진행되어 사람 관계가 차가워지고, 함께 있지만 철저하게 혼자인 경우도 점점 많아진다. 성경에는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고전12:26)라고 했는데, 과연 이런 관계에서 신앙이 제대로 자랄 수 있을지 의문이다.

교인이 많아지고 교회가 커지면 익명화 현상은 어느 정도 퍼지게 마련이지만 그런 일을 극복하려는 노력을 더 많이 기울여야 한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서로를 향한 관심과 함께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겠다는 마음가짐이다. 서로 잘 아는 사이가 아니어도 상대를 안다면 먼저 살갑게 인사하거나 덕담을 나누어 한 교인으로서 정을 돈독히 해야 한다. 사랑은 어디 멀리 있는 것도 아니고, 어렵거나 복잡한 것도 아니라 작은 관심부터 실천하는 것이다.

우리 교회의 모토는 ‘주님처럼 섬기겠습니다’이다. 이처럼 진정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았는지 나부터 돌아보자. 그리고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인사부터 나누어 보도록 하자.


/김 석 집사
철학박사(프랑스 현대철학)
現 건국대 자율전공학부 교수
신문발행국 논설부장

위 글은 교회신문 <381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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