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론과 훌] 루터의 신앙 개혁이 미친 영향

등록날짜 [ 2017-11-21 14:02:59 ]

루터의 개혁으로 파생한 프로테스탄트 윤리가
서구의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이끌어
대한민국도 이 기독교 정신으로 건국돼
눈부신 발전 이뤘지만 잊혀져 가는 현실 안타까워


근대 세계사 1000년 중에서 가장 강한 영향을 끼친 사건을 꼽는다면 ‘루터의 신앙개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다. 과연 루터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마르틴 루터는 1483년 11월 독일 작센안할트 주(州)의 작은 도시 아이슬레벤에서 태어났다. 그곳은 구리 광산이었고 아버지 한스는 광부로 일했다. 어린 루터는 쾌활하고 노래 부르기를 좋아했으며 류트(기타와 비슷한 현악기) 연주에 통달했다고 한다.

중세 유럽은 로마 교황의 지배 아래 있었다. 일반인들은 성경을 읽을 수 없었고, 교황의 말이 하나님 말씀이었다. 예수 복음은 들을 수 없는 영적 암흑 시기였다.

1501년 루터는 독일에서 유서 깊은 에르푸르트 대학 교양학부에 입학했다. 대학생 루터는 다변가로 알려져 ‘철학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1505년 학사 학위를 받은 뒤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법률대학원 과정에 입학했다.

루터가 21세이던 1505년 7월, 시골 마을의 한적한 길에서 심한 뇌우를 동반한 폭풍우를 만났다. 겁에 질린 루터는 살려 주면 수도사가 되겠다고 즉흥적으로 맹세했다. 12일 후 루터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아우구스티노 수도원으로 들어가서 6년 동안 수도회의 엄격한 규율에 따라 살았다. 1512년 박사학위를 받은 루터는 비텐베르크 대학 성서학 교수가 되었다.

1514년 비텐베르크 교회 주임사제로 부임한 루터는 탁월한 설교자로 이름을 날렸다.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게 말씀을 전하는 능력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루터는 더 막중한 책무를 맡게 되었음에도 교황청과는 관계가 점점 멀어졌다. 당시 교황은 1513년에 선출된 레오 10세였다. 이탈리아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에서 처음으로 배출된 교황이다. 레오 10세는 지나친 월권행위로 루터가 교황청에 등을 돌리게 한 인물이었다.

교황의 사치스러운 삶 때문에 2년이 안 되어 바티칸 금고는 바닥났다. 레오 10세는 베드로 대성전 건립, 연이은 호화로운 연회, 예술가들과 추종자들에게 기부금 뿌리기 등을 위해 돈 끌어모으기에 혈안이 되었다.

교황은 40%에 달하는 고금리로 은행가들에게 막대한 돈을 빌렸고, 손실분을 메우기 위해 추기경직과 주교직을 거금에 팔았다. 새 추기경직 31개를 만들어 임명하는 대가로 30만 두카트(약 600억 원)를 받았다. 귀족들은 돈을 빌려 값비싼 관직을 사들였다.

알브레히트라는 방탕한 젊은 귀족은 교황에게 금화 2만 1000두카트(약 42억 원)를 주고 독일 마인츠의 대주교직을 샀다. 이 막대한 금액은 대부분 빌린 돈이었다. 알브레히트는 면죄부(면벌부)를 팔아 빌린 돈을 갚아도 된다는 허락을 교황에게 받아냈다.

레오 10세는 교황이 가진 천국 열쇠의 힘으로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며 면죄부 판매 행위를 정당화했다. 면죄부 판매로 유럽의 금화가 바티칸 금고에 쌓였고, 이 돈으로 레오 10세는 호화로운 생활을 이어 갔다.

보다 못해 분연히 일어난 사람이 마르틴 루터다. 1517년 10월 31일 루터는 비텐베르크 성(城) 교회 나무문에 95개 조에 이르는 면죄부 반박문을 붙였다. 루터의 반박문은 2주 만에 독일 전역에, 2개월 후에는 유럽 각국으로 퍼져 나갔다. 67년 전 구텐베르크가 가동금속활자를 채택한 후 발전한 대량 인쇄술 덕분이었다.

루터는 “교황은 적그리스도다”라고 단언하며 로마를 적그리스도의 소굴인 마귀의 도시 바빌론으로 언급했다. 1414년 체코 ‘얀 후스’가 자신과 같은 주장을 폈다가 콘스탄츠 공의회에 소환되어 화형에 처해진 사건을 루터는 기억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교황의 소환에 응하지 않았다. 교황은 루터를 파문하고 영원한 추방을 선고했다. 루터를 체포하거나 죽이는 자에게는 큰 상을 주겠다고 선포했다.

당시 독일은 통일되지 않았고, 도시국가로 형성되어 있었다. 도시를 지배하던 제후들이 있었는데, 그중 작센의 제후 ‘현공’ 프리드리히가 루터를 바르트부르크에 숨겨 주었다. 당시 루터는 37세였다. 1546년 루터는 63세 나이로 자신이 태어난 아이슬레벤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루터 신앙개혁 500주년 기념 축제 조직위원들은 루터의 어두운 면들도 밝히려고 노력했다. 히틀러와 나치가 루터의 반유대주의 저작물을 이용했고, 독일인들이 양심의 가책 없이 끔찍한 홀로코스트를 방조한 배경이 된 것을 숨기지 않았다.

막스 베버는 “서구 자본주의 발생과 근본정신은 프로테스탄트 윤리에 있다”고 말했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이끈 것은 다름 아닌 기독교라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 미국은 청교도 정신을 바탕으로 건국되었다. 청교도 정신은 법 준수, 근면 성실, 직업을 천직으로 생각하는 윤리다. 이런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미국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발전시켜 세계 초일류 강국이 되었다.

이러한 미국의 건국 정신을 본받아 우리나라를 기독교 위에 초일류 강국으로 건설하고자 한 사람이 바로 이승만 초대대통령이었다. 기독교 사상을 바탕으로 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건국의 이념으로 택해 발전의 기틀을 다졌다. 그 결과 현재 대한민국은 세계 10대 교역 강국이 되었다. 현재 대한민국은 건국의 이념인 기독교 정신을 잃었고 정치도 경제도 방향을 잃고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우리가 잃어버린 소중한 유산에 다시금 관심을 돌려야 할 때가 아닐까.



/정한영 안수집사
신문발행국



위 글은 교회신문 <552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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