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론과 훌] 트럼프의 신의 한 수

등록날짜 [ 2019-07-12 15:07:26 ]

트럼프 대통령의 트윗 한 방에 김정은은 평양에서 3시간 가까이 달려 득달같이 판문점으로 왔다. 김정은을 바로 곁에서 지켜본 한 외신기자는 김정은이 폐기종 환자처럼 쌕쌕거리며 가쁜 숨을 내뱉었다고 말했다. 편치 않아 보이는데도 트럼프의 호출에 만사 제치고 내려온 모습이었다. 예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북한은 트럼프 방한 하루 전인 지난달 28일 중앙보고대회를 열어 핵 보유 의지와 함께 미국에 끌려가지 않을 것을 천명했기 때문이다.


이 광경에 가장 크게 충격받았을 사람은 시진핑일 것이다. 오사카 G20 정상회담 전에 갑자기 평양을 방문해 김정은이 자신의 부하인 듯 연출하며 영향력을 과시하려 했고 G20 미·중 정상회담에서는 대북제재 완화를 트럼프에게 요청했다. 이는 곧 자신이 미·북 간 진짜 중재자이며 자신을 통하지 않고는 북한 비핵화를 달성할 수 없다는 트럼프에 대한 경고이자 견제이기도 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G20 직후 한국으로 날아와 김정은을 불러내 직접 만났다. 시진핑이 무안해지는 순간이다. 김정은도 시진핑보다는 트럼프를 더 반기는 모습이다. 시진핑은 김정은의 환심을 사기 위해 김일성·김정일 미라에까지 참배하고도 김정은에게서 “대국 행세 하려 하지 말라”는 핀잔과 경고를 들었다. 하지만 트럼프가 외교 프로토콜을 무시했는데도 김정은은 반가운 얼굴로 뛰어나왔다.


시진핑 다음으로 당황한 사람은 아베였을 것이다. 아베는 정권에 대한 평가를 받는 참의원 선거를 앞두고 G20 정상회의를 지지율 도약의 발판으로 삼으려 했지만, 트럼프의 판문점 이벤트에 G20 효과는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국제사회 여론은 오사카에서 순식간에 대한민국 판문점에서 열린 트럼프와 김정은의 번개 회동으로 쏠렸다. 현직 미국 대통령이 사상 처음으로 남북한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한 땅을 밟는 장면은 그 자체만으로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더구나 아베는 G20 의장국이면서도 미국에 밀려 ‘반(反)보호무역주의’ 문구를 공동성명에 넣지 못했다는 비판에 시달리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말할 것도 없다. 우리나라 영토 안에서, 안보의 최전선인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에서 트럼프와 김정은이 만나는데 수행원처럼 따라다니며 구경만 해야 했다. 다행히 사진은 한 장 같이 찍었지만 트럼프와 김정은이 50분 넘게 대화를 나눌 때는 옆방에서 기다려야 했다. 대통령인데도 자국 영토에서 벌어지는 일에 철저히 소외당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언론들은 대통령이 겸손했다며 이해하기 어려운 기사들을 쏟아냈다. 나라의 운명과 국가 이익이 첨예하게 충돌하는 현장에서 대통령에게 겸손이 어디 미덕인가? 그러면서 청와대는 “새로운 평화시대가 본격 시작됐다”고 발표했다. 북한 비핵화는 한 발짝도 못 나갔고 한반도 주변에는 군사력이 총집결되어 전운이 감돌고 있는데 또 가짜 평화를 이야기하며 국민을 우매하게 만들고 있다.


그럼 김정은은 어떨까? 김정은은 트럼프로부터 숙제를 다시 받아 갔다. 비핵화 실무협상을 시작한다는 말은 결론적으로 핵 시설과 핵무기 리스트를 다시 내놓으라는 말과 다름없다. 김정은으로서는 ‘하노이 노딜’의 악몽이 되살아나는 듯 할 것이다. 그래도 김정은은 얻어 간 게 하나 있다. 북한 주민들에게 미국 트럼프와 남한의 문재인이 만나자고 간청해 판문점에서 만나 주고 왔다며 선전할 수 있게 되었다.


2020 대선 경선 레이스에 본격 돌입한 미국 민주당도 화들짝 놀랐다. 현지 시간으로 26일 첫 대선후보 TV 토론을 열고 미국의 주요 방송사들이 생중계하며 대대적으로 분위기를 띄우는데 갑자기 전 세계 이목이 트럼프-김정은 판문점 회동으로 쏠리며 흥행에 차질을 빚고 말았다. 위기감을 느낀 미국 언론들은 가짜 뉴스로 트럼프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뉴욕타임스가 앞장섰고 워싱턴 포스트가 뒤따랐다. 트럼프가 재선에 눈이 멀어 김정은과 만난 후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 대신 핵 동결로 정책 방향을 수정하려 한다고 비난했다. 핵 동결은 북한 핵을 인정한다는 의미다. 지금 미국 민심은 트럼프보다 강경하다. 최근 미국 핵과학자회보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국인 33%가 100만 명 이상 사망자가 발생해도 북한에 대한 예방적 핵 공격에 반대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런 민심에 대고 트럼프가 핵 동결을 이야기하면 오히려 재선이 위험해질 판이다. 트럼프는 지금까지 ‘최종적이고 완전히 검증된 비핵화(FFVD)’에서 한 발짝도 물러난 적이 없고 대북 제재도 전혀 풀어 준 바 없다. 하지만 여기에 국내 언론들과 일부 보수 인사들까지 미국의 반(反)트럼프 언론들에 부화뇌동하며 트럼프가 마치 북핵과 재선을 엿 바꿔 먹듯 했다며 비난하고 있다. 몰라도 너무 모른다.


지금 세계는 마치 트럼프를 중심으로 돌고 있는 듯하다. 시진핑과 김정은, 아베, 문재인, 미 민주당까지 트럼프 앞에서 쩔쩔매고 있다. 트럼프의 판문점 번개 회동은 충동적 리얼리티 쇼가 아닌 치밀한 계산과 고도의 전략이 깔린 트럼프만의 신의 한 수였다.



위 글은 교회신문 <632호> 기사입니다.


이웅수 집사
KBS 보도국 기자
신문발행국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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