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 길은 여기에, 나는 어디에

등록날짜 [ 2013-08-13 09:17:34 ]

수없이 많은 길이 우리를 유혹하고 있으나
영생으로 인도하는 길은 오직 예수뿐이다

방충망에 매달려 목청껏 우는 매미 때문에 새벽부터 잠을 설쳤다. 그래서 자연관찰 책에서 유지매미를 들춰 보았다. 매미는 5년에서 길게는 7년 동안 땅속에서 5~6회 탈피하고 지상으로 올라와 우화(羽化, 번데기가 날개 있는 성충이 됨)를 한다. 이어 짝을 찾아 종족을 번식하고 기껏해야 2주 정도 살다 미련 없이 죽는다.

엊그제 오후 늦게 우화하려고 나무를 타고 오르던 매미와 눈이 마주쳤다. 2주 안에 사명을 완수하길 응원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이 폭염 중에도 새벽부터 울어 제치는 매미가 그리 밉지만은 않은 건 베드로를 깨우던 닭소리처럼 들리는 까닭이다.

초등학교 5학년 즈음에 <길>이라는 영화를 흑백텔레비전으로 보았었다. 어린 내겐 난해하고 어려웠다. 영화가 끝나고 왜 제목이 <길>일까, 길과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일까, 고민했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를 따라 실뱀장어를 잡으러 갔다가 앞서 간 아버지와 언니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지금도 어디였는지 모를 그곳은 끝없이 넘실대는 물과 모래밭이 펼쳐진 낯설고 삭막하기 그지없는 곳이었다. 바람은 내 울음을 집어삼키고 사납게 떠밀었다. 나 혼자 버려졌다는 그 막막함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중학교 입학 후 처음으로 IQ 검사를 했다. 신 나게 문제를 풀다가 갑자기 머릿속이 하얘졌다. 도형들이 어지럽게 늘어서 있는데 난 도무지 문제조차도 이해가 안 되었다. 답을 못 찾는 건 당연했다. 공간지각력이 떨어지는, 이른바 길치임을 알았다.

사회생활을 할 때, 영등포 지하도를 이용해야 했다. 지하도로 들어가기만 하면 영락없이 길을 못 찾고 헤매었다. 아찔하고 공포스럽기까지 한 그 경험이란.... 갔던 길을 또 가고 나와 보면 찾는 길이 아니고 몇 번을 뱅뱅 돌다가 결국은 벽에 커다랗게 붙여 놓은 광고판을 기억하고는 얼마나 기뻤던지. 그 뒤로는 항상 같은 길로만 다니며 기억해 둔 광고판을 만날 때마다 내 마음은 안도했다.

결혼 후에도 길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은 여전했다. 서울에서 30년을 산 나도 모르는 길을 제주도가 고향인 남편이 잘 모르는 건 당연한데 남편이 길을 잃을 때마다 거의 비난하듯 했다. 스무 해를 살고 보니 아직도 도로 위에서 종종 길을 잃는 남편을 너그럽게 대할 줄도 알게 되었다.

어떤 사람은 과일을 식전에 먹어야 좋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1일 1식이 몸에 좋다고 한다. 스마트폰은 4G를 넘어 LTE-A로 초를 다투며 진화 중인데, 난 스마트폰 속에서도 종종 길을 잃는다. 진리도 정설도 하루아침에 뒤바뀌는 요즈음, 우리 주님만큼 확실한 이정표가 또 있을까.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정성남 집사(연합여전도회)

위 글은 교회신문 <349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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