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캠페인-새벽을 주께로 ⑧
내 속의 게으름과 싸우라

등록날짜 [ 2006-08-16 10:30:14 ]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후5:15)


새벽예배를 드리며 하루를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시작하고 싶은데, 그것이 간절한 ‘바람’일 뿐 ‘행함’이 되지 않는 건 왜일까? ‘이러면 안 되겠다’ ‘이제부터 다르게 살아야지’ 하는 깨달음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 알기는 하지만 삶의 변화는 없다. 왜일까? 성경 속 지혜를 들춰보며 우리 속의 ‘게으름’을 직시해 보자. 우리 삶의 분명한 선한 목표와 방향을 점검한 후 부지런히 달려갈 결단을 내려 보는 것은 어떨까?

바쁜 삶을 가장한 영적 게으름
“문짝이 돌쩌귀를 따라서 도는 것같이 게으른 자는 침상에서 구으느니라”(잠26:14) 성경은 게으른 자를 문짝을 여닫게 하기 위해 늘 제자리에서 돌고 있는 돌쩌귀(힌지) 같다고 말한다. 이런 사람은 일상적인 것에서 진전이 없는 삶, 도전이나 발전 없이 되풀이되는 삶을 살아간다. 이런 사람은 자기 속에 있는 무엇을 쏟아 내거나, 자신의 체력이나 물질을 다 쓰면서라도 뭔가 이루어야 하겠다는 목표가 없다. 자신을 바꿀 만한 목표는 절제와 희생을 요구하는데, 게으른 사람은 이런 절제와 희생을 싫어한다. 그래서 늘 있던 모습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으로 만족한다.
그렇다면 ‘침상에서 구르지’ 않는 사람은 게으름과 무관할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침상’에 머물지 않고 바쁘게 산다고 해서 모두 하나님 앞에 부지런한 것은 아니다. 매일매일 시간에 쫓기며 바쁘게 살고 하루 종일 분주한 사람들은 흔히 바쁘다는 핑계로 기도도 하지 않고 성경도 읽지 않는다. 주일예배, 수요예배, 금요예배, 새벽예배 모두 빠지지 않고 참석하지만, 그저 규칙적으로 반복되고 있을 뿐이라면 이 사람에게 예배는 바쁜 세상일과 다르지 않다. 믿지 않는 가족이나 친구들로부터 ‘교회에서 산다, 교회에 미친 사람이다’하는 소리를 듣는다 해도 그것은 사실 별다른 의미가 없다. 육체적으로 볼 때는 분명 게으른 삶이 아니지만 영적으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사모함이 없는 영적인 게으름에 빠져있다고 할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에 고통을 주는 게으름
성경은 게으른 사람은 주인에게 신맛을 내는 이의 초 같고 눈을 못 뜨게 만드는 연기와 같이 심한 괴로움을 끼친다고 말한다(잠10:26). 세상의 일은 물론이고, 주님을 사랑하고 충성하는 일에 게으른 자는 하나님의 마음에 고통과 괴로움을 끼친다.
주님은 우리에게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 12:11)고 말씀하신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어진 생의 시간 동안 부지런히 주님을 알아가고, 열매로서 하나님께 영광 돌려드리기를 기대하고 계신다.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벧후1:8)
하나님께서 우리가 모든 영혼의 싫증과 육체의 게으름을 이기고 부지런히 주님을 향해 달려온 것을 아신다는 것은 큰 위로가 된다.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계2:3)

새벽예배, 하루를 시작하는 내 영혼의 단장
목표만 분명하다면 우리는 움직이게 되어있다. 대학입시를 앞둔 ‘고3’이 모든 일에 절제하며 시간을 아낄 수 있는 것은 ‘대학’이라는 분명한 목표가 있기 때문이다. 새벽기도는 그리스도인이 하나님 앞에서 하루를 맞이하며, 하루를 승리하며 살기 위해 자신의 영혼을 단장하는 시간이다. 좀더 자자, 졸자 하는 육체의 요구를 단호히 거절할 수 있으려면 ‘분명한 목표’에 대한 의식이 필요하다. 크리스천은 ‘천국’이라는 목표를 가진 이들이다. ‘천국’에 가기까지는 ‘허리를 동이고’ 모든 나태한 마음과 게으름을 이기고 주님을 위해 살아야 한다. 아직은 ‘맘껏’ 잠을 잘 때가 아니다. 새벽기도 하기로 작정했다면 게으르지 말자. 쉽게 포기하지 말자. 영적인 신령한 목표를 확실히 하여 ‘영적 게으름’을 이기고 성령충만함을 향해 힘차게 나아가자.

위 글은 교회신문 <92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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