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대곤 목사의 평신도신학 <16>] 오직 주의 은혜로만 가능한 구원
구원론 ②

등록날짜 [ 2011-01-05 13:54:02 ]

칼뱅주의 견해 다섯 가지 핵심 포인트-TULIP(튤립)

구원에 관한 칼뱅주의자들의 견해는 전통적으로 알파벳 첫 글자로 만든 튤립(TULIP)이라는 다섯 가지 포인트로 요약할 수 있다. 타락(Total depravity), 조건 없는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제한된 구속(Limited atonement), 저항할 수 없는 은혜(Irresistible grace),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 등 다섯 가지다.

튤립(TULIP)에서 문자 T는 인간의 전적 타락(Total depravity)을 상징한다. 타락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께 긍정적인 반응을 할 수 없다고 성경은 말한다. 아담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모든 것이 달라져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죄로 말미암아 무력하게 된 반역의 종속 ‘아담 안’에 있다(고전15:22).

성경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우리의 전적 타락(Total depravity)에 대해서 설명한다. 바울은 우리가 ‘본질상 진노의 자녀’(엡2:3)라고 말한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우리가 우리의 피부색을 바꿀 수 없는 것처럼 우리의 본질을 바꿀 수 없다고 말한다(렘13:23).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되려면 하나님이 우리의 본성을 바꾸셔야만 할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자녀에게 이 일을 하신다(엡2:1~7). 믿는 자는 문자 그대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고(고후5:17) 새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엡2:15).

우리 자신이 선택한 결박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스스로 하나님께 긍정적인 반응을 할 수 없다.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구원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스스로 구원을 선택할 수조차 없다(롬9:14~23, 엡2:8). 바울은 강력하게 우리의 상태를 요약한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3:10~12). 어떠한 사람도 스스로 하나님 앞에 옳다고 할 수 없으며 심지어 하나님을 찾지도 못한다. 이것이 ‘전적 타락(total depravity)’의 의미다.

튤립(TULIP)에서 문자 U는 조건 없는 선택(Unconditional election)을 나타낸다. 우리가 정말로 영적인 송장이라면 우리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게 할 만한 어떠한 가치도 찾을 수 없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해 구원하신다면, 그렇게 하는 이유는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는 것이다.

바울은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엡1:4~5)”고 선언했다. 또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1:9)”라고 말한다.

창세 전, 인간들의 행위에 따라서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목적에 따라서 하나님은 죄인 된 인간 무리 중에서 그의 자녀를 선택하셨다. 이것이 믿는 자를 하나님의 선택이라고 성경이 설명하는 이유고(마24:22;24;31, 롬8:33) 하나님의 선택이 조건이 없는 이유다. 타락한 인간에게 있는 것은 어떠한 것도 하나님이 선택하는 데 조건이 되지 못한다.

튤립(TULIP)에서 문자 L은 제한된 구속(Limited atonement)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세상 모든 죄를 감당하지만 이 죽음은 오직 하나님이 구원하시기로 예정한 사람들만 구원하도록 의도하였다. 예수는 멸망하기로 운명 지어진 자들을 위해 피를 낭비하며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의 뜻을 이룬 것은 아니다(잠16:9). 요한복음 17장에 기록한 예수님의 대제사장 기도에서는 선택한 자들을 향한 그리스도의 특별한 관심을 볼 수 있다.

예수께서 아버지께 기도하기를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6)라고 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이름이 모든 사람이 아닌 오직 아버지께서 그에게 주신 이들에게만 알려지기를 의도했다. 예수님께서 바로 직후,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저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9~10)”라고 기도한다.

하나님의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완벽하게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처음부터 누가 아버지에게 속해있고 속해있지 않은지 알고 있다(요10:14~16;25~29). 그는 아버지께서 누구를 이끄시고 이끌지 않는지도 알고 있다(요6:44;45). 그는 오직 선택한 자에게만 아버지를 나타내고 그들을 위해서만 기도한다. 마찬가지로 구속에도 적용한다. 아버지께서 구원하기로 작정하지 않은 사람들을 구할 목적으로 예수가 죽었다는 것은 정말로 이상한 것이다. <다음 호에서는 칼뱅주의 나머지 부분과 알마니안주의에 대해 알아본다.>

위 글은 교회신문 <224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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