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족이나 주위 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없고 그를 구세주로 믿지 않아 지옥에 가는 것을 알면서 뻔히 지켜봐야 하는 아픔은 매우 크다. 물론 각자의 믿음과 양심에 따라 느끼는 아픈 정도는 다르겠지만 사도 바울은 그 고통을 이렇게 표현했다.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9:1~3).
①‘큰 근심’. 영어로는 great sorrow(크나큰 슬픔, NIV) 등으로 번역하고, 헬라어 원문은 다. 여기서 슬픔을 뜻하는 (뤼페이)는 감정의 도를 넘어서는 ‘실제적인 상실’의 아픔을 뜻한다. 뜻밖의 사건으로 자식을 잃은 ‘상실’에도 이 단어를 쓴다. 그 슬픈 정도가 크다(great)고 했다. great에 해당하는 (메가레이)는 헬라어 사전에 ‘사람의 감정이나 상태를 감출 수 없어 외부로 드러날 수밖에 없이 커다란’으로 나온다. 바울은 그처럼 감출 수 없는 고통이 ‘항상 실존한다’( 에스틴, exist, be present)고 했다. 이것은 감출 수 없고, 상실의 통증을 실제 육체의 감각으로 느끼는 슬픔을 뜻한다.
②‘그치지 않는 고통’. 영어로는 unceasing anguish로 번역된다. 여기서 ‘고통’을 의미하는 anguish의 원문은 의학 용어다. 웹스터 사전에는 극심한 고통(extreme pain)으로 나오는데 이는 원문인 헬라어의 (오두네이)를 번역했기 때문이다. (오두네이)의 고통은 ‘전신에 뼈마디 골절을 입은 사람이 몸을 움직일 때 느끼는 정도의 통증’을 지칭하는 당시 헬레니즘 외과 의사들의 표현이다. 현대 그리스어 사전에도 ‘몸과 마음을 갉아먹는 고통(consuming grief)’으로 나온다. 그래도 고통을 참을 만한 것은 간헐적이기 때문인데 바울은 이를 ‘그치지 않는’ 고통, 헬라어로 (아데알레이티토스), 즉 잠시도 멈추지 않고(unintermitted) 오래 계속되는(continuous) 고통이라고 했다. 그가 복음의 사명으로 짊어진 양심의 무게가 어떠했는지 가히 짐작하기 어렵다.
이 표현을 과장이라고 오해할까 봐 사도 바울은 몇 마디 덧붙였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언하노라.” 그래서 “내가 대신 지옥에 떨어질지라도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세요!”라는 고백을 할 수 있었으리라. 지옥을 정말 안다면, 부모라도 자식을 대신하여 그곳에 가겠다고 할 사람이 있을까?지옥은 대신 가는 것이 불가능한 곳이다. 바로 직전의 말씀에서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8~39)라고 했다. 만약 할 수만 있다면 대신 지옥에 가고 싶지만 그럴 수 없기에 차마 지옥 갈 영혼을 그냥 두고 볼 수 없는 바울의 양심. 인간이 지옥 가는 것을 차마 그냥 볼 수 없어 인간으로 오셔서 십자가의 길로 대신 가셔야만 했던 예수님의 양심에 감화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