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안과 밖 이야기] 사도 요한의 목회지, 에베소교회
요한계시록 일곱 교회(1)

등록날짜 [ 2015-06-15 14:25:12 ]

로마의 핍박과 이단 사상과 치열한 싸움 치르다 처음 사랑 잃어버려


<사진 설명> 사도 요한 기념교회. 에베소 지역 서쪽 언덕 위에 위치해 있다.

AD 64
년 네로 황제의 기독교 박해 때, 사도 바울이 로마 제국에 체포되어 순교했다. 그 직후 에베소교회의 목회는 그동안 바울을 따라다니며 전도여행에 동참한 디모데가 맡았다. 그러나 디모데도 ‘5월 아데미 축제때 열광하는 군중을 향해 말씀을 선포하다가 군중이 던진 돌에 맞아 순교했다. 마침 에베소에 와 있던 사도 요한이 디모데 사후 에베소교회를 맡아 목회하게 됐다.


사도 요한의 목회 여정

로마는 AD 91년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와 아들 티투스 황제에 이어 티투스의 동생인 도미티아누스가 황제 자리에 올랐는데, 도미티아누스는 어느 황제보다 심하게 기독교를 박해했다.

보통 로마 황제는 죽은 후에 신으로 선포되지만, 도미티아누스는 살아생전에 신이라고 선포했다. 자신의 이름을 따서 도미티아누스 신전을 만들고 시민들에게 경배받기를 원했다. 도미티아누스는 기독교인을 색출해서 박해하는 데에 도미티아누스 신전을 이용했다. 병사들을 시켜서 사람들을 무작위로 신전으로 데리고 와 도미티아누스 동상 앞에 경배하며 분향하기를 강요했는데, 끌려온 사람이 경배하지 않고 황제 숭배를 거부하면 기독교인이라고 단정해 옥에 가두고 박해했다.

에베소에서 사역하던 사도 요한도 도미티아누스 신전 앞을 지나다가 로마 군사들에게 연행됐다. 요한은 황제의 동상 앞에서 경배하기를 거부해 다른 기독교인들과 같은 운명에 처했다. 사도 요한은 로마로 연행돼서 독배를 마셨지만 아무렇지도 않았다. 이후 펄펄 끓는 기름 솥에 던져졌지만 죽음을 면했으며 나중에는 어쩔 수 없이 밧모섬으로 유배돼 채석장에서 혹독한 중노동을 맛보았다고 전해진다. 요한은 밧모섬에서 계시를 받아 <요한계시록>을 기록했다.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측근에게 암살당한 후, 요한은 밧모섬 유배에서 풀려나 에베소로 돌아온다. 이후 요한은 <요한복음>을 기록하고 제자들을 양육하다가 AD 100년경에 95세라는 나이에 주님 품으로 돌아갔다.

사도 요한은 요한계시록 2장에서 에베소 성도들을 향하여 모든 행위와 수고와 인내를 잘 알고 있으며, ‘악한 자를 용납하지 않은 일’, ‘거짓 사도를 드러낸 것’, ‘주의 이름을 위해 참고 게으르지 아니한 행위를 잘 알고,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한 점을 칭찬하고 있다. 반면에 너의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다고 책망한다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교회

에베소교회가 처음 사랑을 잃어버리는 역사적인 사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기독교 박해 때 그들이 신앙을 버린 것이고, 또 하나는 교리적인 싸움으로 성도 간의 사랑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잃어버린 것이었다.

AD 64년부터 네로 황제가 기독교를 박해했는데 이때 에베소교회 성도들은 바울과 신앙을 저버렸다(딤후1:15~18). 이때 어떤 성도들은 순교를 각오하면서 신앙을 버리지 않다가 트로피무스를 비롯해 70여 명이 순교를 당했고, 어떤 성도들은 박해의 칼날이 두려워 배교하기도 했다.

에베소교회에는 또 다른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바로 영지주의에서 파생된 니골라당이라는 이단의 가르침이었다. 니골라당은 극단적 이원론주의자들로 영은 선하고 육은 본래 악하다는 전제하에 악한 육체가 저지르는 모든 행위는 죄일 수가 없다고 주장함으로써 교회의 거룩함과 순수성을 상실하게 했다.

에베소교회는 로마의 박해, 이단 사상과 싸움을 치르며 하나님을 처음 만나고 섬기던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다. 이단 사상과 벌인 치열한 싸움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으로 아군과 적군을 정확히 구분하여 사랑할 사람은 사랑해야 했지만, 사랑, 긍휼, 자비는 없고 차갑고 날카로운 칼날만 번쩍였다.

교회는 복음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이단을 미워하고 그들과 거리를 둘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속에서 자칫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성도 간의 사랑을 모두 잃어버리는 우를 범하기가 쉽다.

처음 사랑과 순수한 복음을 잃어버린 에베소교회 성도들은 지진과 말라리아 병으로, 나중에는 튀르크인들의 칼날에 스러져 갔다. 소아시아 지역의 중심 교회이던 에베소교회는 교회의 기능을 상실하여 결국은 요한계시록의 말씀대로 교회 촛대가 다른 곳으로 옮겨졌고,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 당시 아픔을 간직한 채 여행객을 맞고 있다.

위 글은 교회신문 <438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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