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안과 밖 이야기] 무화과나무 저주 사건의 시기와 교훈
무화과나무

등록날짜 [ 2016-06-07 11:40:42 ]

예루살렘의 영적 상태를 상징적으로 보여 줘 


<사진설명> 돌무화과나무.

무화과는 포도
, 올리브 열매와 함께 팔레스타인에서 가장 인기 있는 유실수다. 무화과 과실을 먹기까지는 손이 많이 간다. 열매가 익을 즈음 병충해를 막으려고 바늘로 일일이 구멍을 뚫어 준다. 또 익으면 바로 따야 한다. 딴 후에는 금세 무르고 상하므로 납작하게 눌러 주어야 한다. 이처럼 무화과 열매를 얻으려면 노동력이 많이 든다.


성경에는 무화과와 관련해 인상적인 대목이 있다. 예수께서 행하신 무화과나무 저주 사건’(11:1314)이다. 예수께서는 열매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를 꾸짖으시고 영원토록열매를 맺지 못하게 했다. 이는 잎만 무성하고 열매 맺지 못하는 예루살렘 유대인의 영적 상태를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그런데 예수께서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사건이 예루살렘 성전 청결 사건전인지 후인지는 분명치 않다.

마태복음 2112~17절을 보면, 종려 주일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 즉시 성전으로 가셔서 성전을 더럽힌 자들을 내쫓으셨다. 그다음 베다니로 가서 쉬시고, 이튿날 아침 성전으로 들어오시다가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다.

그런데 마가복음 1111~19절에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후에 성전으로 들어가 매매하는 자들과 돈 바꾸는 자들을 내쫓으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누가복음에서는 무화과나무를 언급하지 않는다. 다만 누가복음 1945~46절에서 성전에 들어가신 후 청결케 하신 얘기만 짧게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어 쫓으시며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19:45~46).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 순서를 달리 기록한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난감하다.

하지만 복음서의 서술 방식을 기준으로 시간상 순서를 추측해 볼 수 있다. 마가복음이 연대기적으로 기술한 것과 달리 마태복음은 주제 중심으로 묶여 있다.

예컨대 예수께서 하신 산상수훈 말씀도 마태복음에서는 5~7장에 모두 모아 두어서 단번에 설교하신 것처럼 느끼게 한다. 하지만 누가복음 620~49절과 다른 곳에서는 주님께서 사역 기간 3년 중 여기저기서 같은 내용을 말씀하고 계신 것을 볼 수 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자마자 바로 성전에 들어갔다는 내용을 동일하게 기술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가로되 이는 누구뇨 하거늘 무리가 가로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자를 내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21:10~12).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가사 모든 것을 둘러 보시고 때가 이미 저물매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베다니에 나가시다”(11:11).

주님은 성전 뜰을 보면서 3년 전에 봤던 똑같은 광경을 발견하셨다.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의 앉은 것을 보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2:13~17).

그때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드는 자들을 크게 책망하셨다.

마가복음은 연대기적 기록을 원칙으로 삼아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후 성전에 들어가 청결케 하신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마태복음은 주제별 기록을 원칙으로 성전 청결은 주일 오후에 한 것으로 설명해 성전에 들어가신 모습을 강조했다.

사건의 순서보다 더 중요한 점은, 주님께서 공생애 초반에 하신 것처럼 공생애 마지막에도 주님 임재의 처소인 성전을 청결케 하셨다는 사실이다. 

위 글은 교회신문 <482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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