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말씀] 주님의 고난을 나의 몫으로

등록날짜 [ 2004-01-10 18:10:47 ]

본문말씀 마태복음 26:57∼68
예수를 잡은 자들이 끌고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가니 거기 서기관과 장로들이 모여 있더라 베드로가 멀찍이 예수를 좇아 대제사장의 집 뜰에까지 가서 그 결국을 보려고 안에 들어가 하속들과 함께 앉았더라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거짓증거를 찾으매 거짓 증인이 많이 왔으나 얻지 못하더니 후에 두 사람이 와서 가로되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 하니 대제사장이 일어서서 예수께 묻되 아무 대답도 없느냐 이 사람들의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뇨 하되 예수께서 잠잠하시거늘 대제사장이 가로되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이에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저가 참람한 말을 하였으니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보라 너희가 지금 이 참람한 말을 들었도다 생각이 어떠하뇨 대답하여 가로되 저는 사형에 해당하니라 하고 이에 예수의 얼굴에 침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혹은 손바닥으로 때리며 가로되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더라


죽기 위해 오신 예수

하나님의 눈으로 우리 인간을 바라보실 때, 죄로 말미암아 병들고 저주받고 고통당하다가 영원한 지옥의 멸망을 피할 수 없음을 보시고 그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기 위해 말씀을 보내주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시려고 동정녀 마리아에게 잉태되어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마리아는 요셉의 정혼녀였기에 사람들의 눈에는 요셉의 자식이라는 신분으로 이 땅에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삼십년간 요셉의 집에서 자라나셨습니다. 누가 봐도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볼 수 없도록 그의 신분을 감추셨습니다. 만약 유대인들이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누가 감히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겠습니까? 그는 죽기 위해 철저히 자신의 신분을 감추셨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드디어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죽은 자를 살리고, 문둥이를 고치는 능력을 행하시며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유대인들에게 알게 하셨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 있어 가장 큰 죄는 하나님의 신성을 모독하는 죄입니다. 유대인들이 보기에 예수는 나사렛에 사는 목수 요셉의 아들임이 확실한데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하고 다니니, 하나님을 섬기는 선민임을 자부하던 유대인들에게는 십자가에 못 박아 저주하여 죽일 만큼 엄청난 신성모독 죄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본문에 예수를 붙들어다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고 신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성 모독 죄
한 증인이 말합니다.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마26:61).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성전은 자기 민족을 다스리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이 친히 계신 곳으로 거룩한 곳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범죄 할 때마다 짐승을 잡아 피 흘리며 제사를 드려서 죄를 용서받는 곳이 성전입니다. 그런데 그런 성전을 헐어버린다는 것은 하나님과 유대인들과의 관계를 파괴한다는 것이니 이는 하나님께 대한 모독이며, 유대민족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길을 가로막는 범죄 중의 범죄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왜 성전을 헐고 사흘만에 다시 짓겠다고 말씀하셨을까요? 짐승이 죽어야 할 대신 예수 자신이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으신 후 삼일만에 부활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제 어디를 가든지 예수의 피를 믿고 회개하는 자마다 다 속죄함을 받게 되나니, 예수 자신이 곧 영원한 죄를 속죄하는 성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짐승을 잡아서 제사하는 성전은 더 이상 필요가 없기 때문에 “성전을 헐어 버려라 내가 삼일만에 짓겠다”고 하셨는데 그런 하나님의 섭리를 모르기 때문에 성전을 헐어 버리라는 말로 인해 그를 죽이자는 것입니다. 예수를 사람으로 보았기에 예수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혹은 손바닥으로 때리며 잔인하게 핍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의 구원주이시며, 우리의 믿음이시며, 다시 오실 재림의 주님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수난
예수님은 이토록 철저하게 자신의 신분을 감추셨습니다. 그래야 유대인들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수난은 창세기 3장부터 이미 예언되어 있습니다. 이사야서에 와서 구체적으로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또 53장에 가서는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칠백 년 전에 이미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예언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우리 인간은 이와 같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통하여 죽지 아니하시면 우리는 영육간에 파멸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지만 하나님은 미리 아시고, 그가 찔리지 아니하면 우리의 허물을 해결할 수 없고, 그가 상하지 아니하면 우리의 죄악을 담당할 수 없고, 그가 징계를 받지 아니하면 하나님과 우리와의 불목을 해결할 수 없고, 그가 채찍에 맞지 아니하면 우리의 질병의 고통을 해결할 수 없기에 그가 찔리시고, 상하시고, 징계를 받으시고, 채찍에 맞으시고, 피 흘려 죽으신 것은 우리의 영육간의 죄와 저주와 질병과 영원한 멸망에서 우리를 건지시기 위함입니다.

거침없는 사랑
주님은 멸망할 수밖에 없는 죄의 문제를 우리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기에 그분이 대신 담당하시고 우리에게 “회개하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우리가 언제 우리의 영육간의 멸망을 위해 도와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습니까? 우리가 죄로 인해 지옥 갈 수밖에 없으니 언제 살려 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자원하시면서까지 자기의 육체를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그토록 잔인하게 사용해 버리셨습니다. 주님은 인류 구원의 사역을 위해 이 땅에 오셔서 귀신을 쫓으시고 병을 고치시고 죄를 사하시며 종횡무진 마귀, 사단, 귀신의 역사를 파괴하시고 거침없이 인간을 살리는 일에 전능하신 하나님의 모든 수단을 다 실천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자기의 일을 마치시려고 스스로 매 맞으심과 저주받으심과 피 흘려 죽으심을 자처하셨습니다. 인간의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 겟세마네 동산의 최후의 몸부림치는 절규의 기도는 위로는 하나님의 가슴을 뒤흔들어 놓았으며 아래로는 온 인류의 가슴을 뒤흔들어 놓는 전무후무한 사건이었습니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22:42) 이처럼 몸부림치는 아들의 절규,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의 절규를 뒤로하신 채 인간의 구원을 선택하셨습니다. 그 크신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신 사건 때문에 우리는 이처럼 구원받고 영생을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의 고난은 우리의 기업
이 지구 안에는 죄 문제를 해결할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으시는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오직 그 방법뿐입니다. 예수께서는 의로우신 하나님이셨지만 자기의 전능하신 능력을 다 포기하고 인간을 향한 영원한 사랑의 실천을 위하여 가야바 안뜰의 모진 매질과 수모를 참으면서 입을 열지 않고 고난을 당하셨으니 이 고난이 인류를 위하여 당하시는 고난인 것을 누가 감히 짐작이라도 했겠습니까! 홍포를 입고 이리저리 끌려 다니면서 당한 수모와 매질과 피에 얼룩진 수난의 참상은 위로 하나님 아버지의 가슴을 터질 듯이 아프게 하는 것이었으며,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도 가슴이 폭발될 듯이 ‘하나님의 아들이 나 같은 죄인을 위해서 이렇게까지 사랑하실 수가 있을까?’ 하며 절로 터져 나오는 견딜 수 없는 충격으로 영혼과 육체에 전율이 흐르듯 “오, 예수여!” 할 뿐입니다.


우리는 이토록 감당 못할 사랑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 앞에 감사의 절규가 절로 터져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분 앞에 원망과 불평과 무관심으로 대한다면 주님의 가슴이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우리는 이 고난을 절대 소유해야 합니다. 바로 예수께서 당하신 고난은 우리만의 기업이기 때문입니다.

은혜 받은 자의 자세
주님은 구원받은 우리를 통해 찬양 받기를 원하십니다. 예배 받기를 원하십니다. 자기 일에 충성해 주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그렇게 요구하실 권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분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습니까? 우리는 주님 앞에 진실해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죽기까지 진실하셨으니 우리도 주를 위해 죽기까지 진실해야 합니다. 주님의 은혜 베푸시는 진실과 우리의 은혜 받는 분량의 진실의 상사점에서 만나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 “다 이루었다 하시고 그 영혼이 떠나니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엇을 다 이루셨다는 말씀일까요? 십자가에서 잔인한 처형을 당하시며 인류의 죽음을 대신해서 죽으시고 인간이 죽어야 할 죄의 값을 갚으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그 고난과 죽으심을 다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를 향한 사랑의 약속을 다 이루셨습니다. 아들을 보내서 우리를 살린다고 하신 약속을 이루셨습니다. 자기가 약속하고 자기가 이루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신 믿음의 기업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은혜 받을 때마다 주를 위해 살겠다고 각오하지만 하루를 못 버티고 날마다 변질되고 있으니 우리의 모습이 얼마나 초라합니까? 우리는 절대로 변해서는 안 됩니다. 너무도 큰 은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고난 주간을 맞이하여 주님의 고난을 우리의 몫으로 가지고 누려야 합니다. 우리의 가슴이 터질 듯이 감사하며 주님의 가슴속으로 우리의 감사와 찬양과 충성의 영광이 터질듯이 폭발하는 그런 삶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위 글은 교회신문 <48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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