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말씀] 모든 족속으로 제자 삼으라

등록날짜 [ 2019-04-02 16:57:02 ]

마태복음 28장 16~20절
“열 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의 명하시던 산에 이르러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있더라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신앙생활을 직장생활만큼도 못 하는 사람 많아…예수 은혜 잊어버렸기 때문
예수의 고난과 죽으심에 감동 없는 사람은 잘 먹고 잘 사는 것만 삶의 목적
‘모든 족속으로 제자 삼으라’는 말씀은 누구도 제한하지 말고 전도하라는 뜻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우리를 사랑하기 위해서입니다. 육신을 입고 와서 살 찢고 피 쏟아 자기 목숨을 주지 않으면 안 되는 우리 인간들에게 사랑을 베풀기 위해 오셨습니다.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당하신 예수
이사야 선지자는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 7:14)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실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입니다(마 1:23). 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 53:5)라며 예수의 고난과 죽음을 이사야는 예언하였습니다.


이 예언의 말씀대로 예수께서는 600년 후 당시 유대인 제사장, 바리새인, 장로 그리고 율법사, 서기관 등 소위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핍박을 받습니다.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칭했다는 신성 모독죄로 하나님의 아들을 때리고 찌르고 상하게 하고 징계받게 하고 저주하였습니다. 사람이 눈 뜨고는 볼 수 없는 처참한 고통을 예수에게 가했습니다.


얼마나 처참하게 고통을 가했던지 오죽하면 서른세 살 나이의 건장한 청년이 자기가 짊어지고 갈 십자가를 감당하지 못해서 쓰러지고 또 쓰러졌겠습니까? 세 번째 쓰러지셨을 때는 무거운 십자가와 함께 바닥에 나뒹굴면서 일어날 기력조차 없었습니다. 피에서 생명과 기력이 나오는데, 매를 너무 많이 맞고 살이 찢겨서 피를 다 쏟았으니 무슨 힘이 있어 걸을 수 있겠습니까? 매로 때려도 일어나지 못하자 로마 병정들은 예수께서 더는 십자가를 지고 갈 수 없다고 판단하고 지나가던 건장한 구레네 사람 시몬에게 대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까지 가게 했습니다. 모질게 매를 맞아 피로 얼룩진 몸에 다시 못을 박을 때 더 흘릴 피가 있었겠습니까? 마침내 예수를 못 박아 매단 십자가를 세우기 위해 파놓은 구멍에 형틀을 집어넣을 때, 몸이 휘청휘청하고 축 늘어지면서 못 박힌 손과 발이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예수께서는 우리가 당할 고통을 모조리 짊어지시고 그렇게 팔레스타인 태양 볕 아래 여섯 시간 동안 매달려 있었습니다. 사람이 이렇게도 고통스럽게 죽을 수도 있다고 할 정도로 말입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는 사람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네가 메시아냐? 그러면 한번 십자가에서 내려와 봐. 그러면 우리가 너를 믿겠다”라며 예수를 저주합니다. 마귀가 사람들을 통해 온갖 조롱을 퍼붓습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고통당하시며 서서히 목숨이 끊어져 갑니다.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견딜 수 없는 고통은 계속됩니다. 드디어 자기 육신의 때를 마치는 최후에 “다 이루었다!”고 하시며 운명하셨습니다. 구약성경에 선지자를 통해 하신 말씀을 예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그대로 이루신 것입니다.


나를 살리기 위한 고난과 죽음
사랑하는 성도여,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떤 고통을 당한들 주님이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당하신 고통에 비교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당하는 고통이 아무리 커도 주님 당하신 고통에 비교가 안 됩니다. 우리는 우리 죗값으로 당연히 당해야 하는 고통이지만, 주님은 그 고난을 당하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우리 때문에 자원해서 고의적으로 고통을  당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왜 하나님의 아들이 이런 고통과 죽음을 당하셔야 했습니까? 바로 내 영혼을 살려내기 위해서입니다. 내 영혼을 지옥에 안 보내려고, 마귀의 손아귀에서 빼앗아서 천국에서 살게 하려고 내 죗값을 자기 고난과 죽음으로 갚으신 것입니다. 자기 잘못 때문이라고 해도 이런 참혹한 고통은 견딜 수 없는데, 하나님 아들이 자기가 만든 인간 때문에 이런 고난을 당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 일입니까?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고난과 죽음을 자청하신 것은 자기가 만든 피조물을 향해 “너희는 지옥 가면 안 돼. 내가 모든 죗값을 대신 담당하겠으니 이제 너희가 지옥 가는 일을 멈춰!”라며 강하게 브레이크를 거신 것입니다.


지옥은 세세토록 괴로움을 당하는 곳입니다. 발바닥을 디딜 수 없을 만큼 사람이 형언할 수 없는 뜨거운 불로 가득한 곳입니다. 지옥은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 곳이요, 그 불 속에서 사람을 소금 치듯 한다고 했습니다(막 9:47~49). 지옥은 위를 봐도 아래를 봐도 전후좌우 어디를 봐도 나가는 문이 없는 참혹한 곳입니다. 나가는 문은 영원히 없으니 얼마나 절망적입니까? 주님은 우리를 이 지옥에서 건지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인간의 말로 형언할 수 없이 행복한 천국에서 영원히 살게 하시려고 십자가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보좌에서 영광을 영원히 누리실 하나님의 아들이 말씀의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와서 나 때문에 고의로 죽으셨다는 사실을 체험으로 알고 믿게 될 때 “도대체 내 생애에 무엇으로 이 은혜를 갚으랴”라는 고백이 주체 못 할 감사와 감동과 함께 밀려오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진정한 신앙생활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직장생활만큼도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예수께서 베푸신 사랑과 은혜를 체험하지 못했거나 받았으면서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가 받은 은혜가 너무 커서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1:24)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수의 고난과 죽으심에 감동이 없는 사람은 종교생활처럼 교회에 왔다 갔다 합니다. 이런 사람은 육신이 잘 먹고 잘 사는 것만이 삶의 목적입니다. 그런 사람의 영혼의 때는 보장이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자기가 신앙생활 잘하는 줄로 오해합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주신 목적은 우리가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죽기 위해 오신 예수

예수께서 모진 매를 맞을 때, 유대인들은 그렇게 맞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습니다. 채찍에 맞아 찢어진 살이 빌라도의 뜰에 떨어져도 누구 하나 “저분은 맞아서는 안 된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빌라도가 유대 군중 앞에서 “이 사람이 무슨 죄가 있느냐 나는 죄를 찾지 못하겠노라”고 세 번씩이나 물었을 때 사람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라고 소리쳤습니다. 빌라도가 볼 때, 로마의 법으로는 예수를 죽일 이유가 없었지만 제사장부터 서기관, 바리새인과 장로 등 수많은 유대인이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동하니 어쩔 수 없었던 것입니다. 만약 그냥 예수를 놓아줬다가 유대인들이 들고 일어나면 자신의 지위가 위태로워지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이 민란을 일으킬까 두려워 비겁하게 법적으로 분명히 안 죽여도 되는 자를 죽이라고 내놓을 정도였으니 어느 누가 예수를 변호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께서는 이렇게 모두 다 십자가에 매달아 죽여야 한다는 저주 속에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예수께서는 죽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를 지기 전에 제자들에게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미리 수차례 말씀하셨습니다.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마16:21).


이 말씀대로 예수께서는 대제사장 가야바의 안 뜰에서 심문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를 죽일 거짓 증거를 찾으려 했으나 얻지 못하자 예수에게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고 심문합니다. 그렇다는 대답이 나와야 신성 모독죄로 죽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드디어 예수께서 “네가 말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곧바로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저가 참람한 말을 하였으니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보라 너희가 지금 이 참람한 말을 들었도다”라며 이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판결합니다. 하나님을 모독하는 참람한 말을 하였으니 죽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죄목으로 죽이겠다고 하니 세상에 이런 죄목이 어디 있습니까?


그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인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잘 알면서, 모세가 준 율법은 그렇게 철저하게 지키려 하면서, 율법의 정죄를 받아 죽을 인간을 살리려고 오신 예수를 그렇게도 모를 수가 있습니까?


예수께서는 말씀하신 대로 고난당하고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때 제자들은 얼마나 실망이 컸겠습니까?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분, 물 위로 걸어가신 분, 바닷바람도 꾸짖어 잔잔하게 하시고 자연 질서를 모순되게 하면서까지 만물을 지배하시는 분, 송장을 살아서 일어나게 하신 분, 귀신을 쫓고 병을 말씀 한 마디로 고치시던 분, 말씀 한마디로 무엇이든 하실 수 있는 분을 모셨으니 얼마나 자부심이 컸겠습니까. “이분이야말로 우리의 메시아다. 로마의 권세를 파괴하고 이스라엘의 국권을 회복해 식민지를 끝내고 세계를 지배할 왕이다. 이분이 왕이 되면 나도 한 자리 얻을 수 있겠다”라는 야망을 품게 했던 분입니다. 그런 예수께서 갑작스럽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사건이 벌어졌으니 제자들이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의 제자들을 잡으면 시체를 훔쳐가서 부활했다고 거짓소동을 피운다는 죄목으로 잡아 가두려고 그들을 찾으러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의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져서 숨어서 지내야 했습니다. 예수께서 삼 일 만에 다시 살아나리라고 하셨던 그 말씀을 그들은 이해하지도, 기억하지도 못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그런데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죽으신 지 삼 일 만에 무덤에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실의와 절망에 빠져 있던 제자들에게 열한 번 나타나셨습니다. 그렇게 여러 번 나타나셨으면 예수께서 부활하신 것이 확실한데도 아직도 의심하는 자가 있다고 했습니다(마28:16~17).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마 28:18~19)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제자 삼으라는 말은 선생과 같은 사람을 만들어 내라, 즉 예수와 똑같은 사람을 만들어 내라는 뜻입니다. 예수와 같은 마음, 같은 생각, 같은 뜻, 같은 믿음, 같은 행동을 하는 사람을 만들어 내라는 것입니다.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하셨으니 어느 족속이든 상관없습니다. 예수께서 피 흘려 죽이신 것은 나만을 구원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오늘날 전 세계 75억 인구 한 사람도 빠짐없이 싹 다 구원받기를 바라시고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어느 누구도 지옥 가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래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 삼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 삼으라는 말은 예수 믿고 회개하고 구원받고 성령 충만 하게 해 모두 예수의 증인이 되게 하라는 뜻입니다. 우리 교회 성도들이 1년에 한 사람이 한 사람만 제자를 삼으면 교회를 또 하나 지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주님 말씀에 순종한다면 교회 부흥은 중단이 있을 수 없습니다.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말씀은 어느 누구도 제한하지 말고 전도하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아버지의 뜻과 아들의 생애와 성령의 증거로 이루어진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역사가 네게 이루어졌거든 내 이름으로 침례를 받아라”는 뜻입니다. 물속에 들어갔다 나오면서 ‘예수의 죽음이 내 죽음이요, 예수의 부활이 내 부활이요’라며 주님과 연합을 고백하라는 것입니다. “나는 아담 때부터 이미 죽은 자였으나 예수께서 죽으심을 믿고 회개하는 순간 나도 구원받아 부활하게 되었습니다. 구원을 이루기 위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역사가 내 안에 이루어졌습니다”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이 침례입니다.


그다음에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분부가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사복음서 전체가 주님이 분부하신 일을 기록한 책입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저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어 쫓으시더라”(막1:38~39). 예수의 생애를 기록한 사복음서는 예수께서 병 고치고 귀신 쫓고 전도한 내용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서의 가르침에 순종하는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전하지 못해 예수 못 믿고 지옥 간다면 전도하지 않은 사람이 책임져야
주님 이름으로 죽어가는 영혼 살리는 일에 귀하게 쓰임 받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성령의 권능으로 하는 전도
주님께서는 그냥 제자 삼으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에게 준 권세를 가지고 예수를 증거하여 제자 삼으라는 말입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침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침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행 14~5). 그리고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 예수께서 하신 이 마지막 분부를 오백 명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삼백팔십 명이 도망가고 백이십 명만 남아 마가 다락방에 모여서 성령을 받기 위해 힘써 기도했습니다. 열흘 후 말씀대로 성령이 임하면서 큰 권능을 받았습니다. 성령받은 자들에게 권능이 임하고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나와서 복음을 전할 때 놀라운 이적이 일어납니다. 그때 예루살렘에는 14~16개국 사람들이 와서 살았는데 제자들이 성령 충만하여 방언을 말하자 각국에서 온 사람들의 귀에 자기 나라의 말로 들렸던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의 권능을 가진 자에 의해 복음은 증거되었습니다.


마가복음 16장 17~20절에도 믿는 자는 권능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한다고 했습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리우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시니라.” 제자들이 예수를 전파하니 확실히 귀신이 떠나가고 질병이 치료받고 수많은 사람이 회개하고 돌아오더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 최후에 유언처럼 남긴 말씀이 “가서 성령으로 내 증인 되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왜 이 땅에 왔으며, 왜 찔리고 상하고 징계 받고 채찍에 맞으셨으며, 왜 저주받고 십자가에 달려 잔인하게 죽으셨는지를 설명해 주라는 말입니다. 예수께서 죄인이었으면 부활하지 못했을 텐데 죄가 없으시기에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증거하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와서 능력을 행하신 것처럼 이 능력을 너희도 행하면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진 예수가 성령으로 너희와 함께 계시면서 일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라는 뜻입니다.


예수의 정신으로 전도하라
연세중앙교회가 연희동에 있을 때 성도들의 전도는 정말 대단했습니다. 지하실에서 개척교회를 시작했으니 얼마나 환경이 열악했는지 모릅니다. 늘 습기가 차 있어서 문을 열고 들어오면 곰팡이 냄새가 확 나서 멈칫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도 전도가 봇물을 이루면서 교회가 부흥했습니다. 성도들의 전도는 아주 단순했습니다. “우리 교회 한번 와 봐. 개척교회라고 생각하지 말고 한번 와서 말씀을 들어봐.” 그때는 한 달에 한 번씩 부흥회를 했는데 병든 사람이든 초신자든 참석해서 은혜만 받으면 금방 예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지금 성도들이 연희동성전 시절처럼 열정을 갖고 전도한다면 아마 교회를 일 년에 한 개씩 세워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에게는 모든 족속으로 제자 삼을 생각이 없습니까. ‘나는 피 흘려 죽어도 좋아, 너는 구원받아야 된다’는 주님의 심정, 예수의 정신, 구령의 열정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을 살리려고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전해 주지 않아 지옥에 간다면 이보다 더 잔인한 일은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신앙양심이 없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내가 모든 족속에게 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신앙양심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전하지 못해서 저 사람이 지옥 간다면, 예수께서 피 흘리신 것이 무용지물이지 되지 않겠습니까? 주님이 당한 고난과 죽음이 그 사람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어서 예수 못 믿고 지옥 간다면 그 책임은 전도하지 않은 사람이 져야 합니다. 일 년 내내 한 사람도 전도하지 못했다면 남이야 지옥 가든 말든 상관없이 나만 구원받았으면 된다고 여기는 무관심자입니다. 또 주님의 유언과 같은 명령에 불순종하는 자입니다. 우리는 정신을 차려서 주님의 말씀대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야 합니다. 예수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죽어도 좋으니 너만은 살아야 한다는 예수 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주님이 찔리고 상하고 징계받고 채찍에 맞으시고 죽으심이 헛되지 않도록 예수를 전하는 복음 전도자가 됩시다. 죽어 가는 영혼을 살리는 일에, 모든 족속을 제자 삼는 일에 구령의 열정으로, 예수의 정신으로 귀하게 쓰임받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위 글은 교회신문 <618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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