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말씀] 주님의 고난을 내 것으로 하라

등록날짜 [ 2019-04-19 15:18:50 ]

마태복음 26장57~68절

“예수를 잡은 자들이 끌고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가니 거기 서기관과 장로들이 모여 있더라
베드로가 멀찍이 예수를 좇아 대제사장의 집 뜰에까지 가서 그 결국을 보려고 안에 들어가 하속들과 함께 앉았더라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거짓증거를 찾으매
거짓 증인이 많이 왔으나 얻지 못하더니 후에 두 사람이 와서


가로되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 하니
대제사장이 일어서서 예수께 묻되 아무 대답도 없느냐 이 사람들의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뇨 하되
예수께서 잠잠하시거늘 대제사장이 가로되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이에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저가 참람한 말을 하였으니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보라 너희가 지금 이 참람한 말을 들었도다


생각이 어떠하뇨 대답하여 가로되 저는 사형에 해당하니라 하고
이에 예수의 얼굴에 침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혹은 손바닥으로 때리며
가로되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더라”



구원 받을 수 있는 기회는 육신을 입고 있는 지금, 죽은 다음엔 기회 없어
신앙생활은 내가 살기 위해 해야 할 ‘내 일’…고난주간 최상의 감사를 드려야



성경 말씀에는 우리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 목소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 약속의 말씀대로 실천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입니다. 예수 믿고 거듭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보내어 인간은 모두 죄인이며, 죄의 결과가 사망이라는 사실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이 땅에 보내셔서 인간의 죄를 발견하는 율법을 더욱 강화하셔서 행동하지 않고 마음으로 음욕만 품어도 간음이요, 남을 미워만 해도 살인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의로우신 율법 아래 의로운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실제로 우리 인간은 최초의 범죄자인 아담의 후예로서 원죄를 잉태한 자요, 또 스스로 범한 자범죄에 걸려 벗어날 길이 없는 죄인입니다. 그래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롬 3:10).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요한을 먼저 보내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살려고 하는 자를 향해서 “회개하라”고 외치고 침례를 주었습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죄가 없다고 회개하지 않았지만 자기 죄를 깨달은 자들은 요단강에 나와 요한에게 회개케 하는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때 죄 없으신 예수께서도 침례를 받으셨습니다. 회개하는 자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고 부활할 것이라는 사실을 침례를 통해 예표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용서와 속죄는 다르다
마지막 선지자인 침례요한까지 구약시대에는 율법을 범한 자들이 살기 위해서 짐승을 피 흘려 잡아 자신이 이렇게 죽을 죄인임을 고백하는 제사를 드려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죄를 용서 받지 않으면 죄 아래서 온갖 저주를 받고 불행한 일이 닥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짐승을 드리는 제사는 죄를 완전히 없애는 것이 아니라 묵인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용서와 속죄는 다릅니다.

성경은 속죄와 용서의 차이를 예화로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8장 23절 이하에 보면 일만 달란트라는 어마어마한 빚을 짊어진 종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빚의 굴레를 짊어졌으니 얼마나 절망 가운데 살았겠습니까? 어느 날 주인이 그를 불러 빚을 갚으라 독촉했습니다. 그는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며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했습니다. 그런 모습을 불쌍히 여긴 주인은 “도저히 네 힘으로 그 돈을 갚을 수 없으니 그냥 없는 것으로 하자”며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주인의 긍휼로 순간에 채무에서 벗어났으니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그렇게 큰 은혜를 입은 자가 길에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만났습니다.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 하루 품값에 해당합니다. 일만 달란트 빚에 비하면 적은 액수입니다. 그런데 백 데나리온 빚진 자의 멱살을 잡고 빨리 빚을 갚으라고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달라는 애원을 무시하고 그를 옥에 가둬버렸습니다. 이 사실을 일만 달란트 빚을 탕감해 준 주인이 알게 되었습니다. 그의 처사를 괘씸히 여긴 주인은 다시 일만 달란트 빚을 적용했습니다. 일만 달란트 빚을 탕감해 준 것을 취소한 것입니다.

죄도 이렇게 일시적으로 용서받았다면 언제든지 다시 물을 수 있습니다. 짐승을 잡아서 피를 흘리는 것은 죄를 용서받은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속죄는 다릅니다. 갚을 길이 없는 죄를 완전히 갚아 주시는 것은 물론 그 죄를 다시 묻지 않는 것이 속죄(贖罪)입니다. 그래서 속죄 받은 자는 죄의 빚에서 완전히 자유롭습니다. 사망이라는 죄의 빚을 예수께서 대신 죽어 갚아 주셨으니 우리는 죄에서 완전히 속죄받은 사람, 죄에서 자유를 얻어 해방된 사람입니다.



실상이신 예수
이처럼 용서받은 자는 그 약속이 무효로 될까 봐 두려움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만약 짐승의 피로 완전히 속죄할 수 있다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이 땅에 올 필요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요단강에서 침례를 받으실 때 침례요한이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외쳤습니다(요1:29). 왜 예수를 제사 때 드리는 대표 제물인 어린양이라고 표현했을까요?

구약시대 짐승을 드리는 제사도 예수가 어린양처럼 와서 인류의 모든 죄를 대신 단번에 짊어지고 피 흘려 죽어 죄를 속할 것을 예표(豫表)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짐승의 피 때문에 용서하신 것이 아니라 장래 흘릴 아들 예수의 피를 기억하면서 죄를 용서해 주신 것입니다. 짐승의 피를 보면서 앞으로 예수가 와서 인간을 위해 피 흘려 죽어 죗값으로 오는 사망을 대신 갚아 줄 것이라는 의미에서 침례요한은 예수를 어린 양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에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주예수를 바라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양의 피는 온전치 못하다는 말이요, 온전케 하시는 분이 예수라는 뜻입니다. 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히11:1)라고 했습니다. 구약시대 사람들이 짐승의 피를 흘리며 드린 제사는 실상(實像)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들도 실상이신 예수를 믿음으로 바라보며 제사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케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그러나 이 제사들은 해마다 죄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히10:1~4).

구약시대 사람이 짐승의 피를 흘리며 용서받기 위해 온전케 하시는 주 예수를 바라보았다면, 우리는 직접 예수 피 공로를 만나 속죄함받은 자로서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있으니 이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입니까? 얼마나 받은 은혜에 큰 감사를 해야 할 사람들입니까?

그러면서도 “죄는 인간이 지었는데 왜 짐승이 고통 속에 죽어야 합니까? 죄는 내가 지었는데 왜 예수께서 생축처럼 나를 대신해 죽으셔야 합니까?”라고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참으로 주님 앞에 염치없고, 또 한편으로는 감사할 뿐입니다. 우리는 예수의 피로 속죄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만약 속죄의 은총을 받지 못한다면 원죄와 자범죄로 반드시 죗값을 치러야 합니다. 그 죗값으로 땅에서 수많은 저주와 질병과 고통을 겪으면서 살다가 죽은 후에 지옥에 가서 참혹한 멸망을 당해야 합니다. 사람이 이 땅에서 오래 살려고 온갖 수단을 다 부려도 목숨을 영원히 유지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살다가 죽은 다음에도 죗값은 사망이기에 지옥 가야 합니다. 지옥에서 인간이 견딜 수 없는 참혹한 고통을 영원히 견뎌야 합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우리 죄를 속하시고 사망에서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마태복음 1장 21절에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고 했습니다. 또 23절에는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여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죄가 내 안에 있으면 하나님과 내가 죄로 가로막혀 함께하지 못합니다. 예수께서 내 죄를 해결하지 않으면 하나님과 함께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육신을 입고 어린 양처럼 죽으러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어떻게 죽으실지 예언하였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나음을 입었도다”(사53:5). 예수께서는 우리 허물을 사해주려고 찔리셨습니다. 우리의 죄악을 해결해 주려고 상하셨습니다. 우리 대신 징계를 받으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려고 십자가라는 저주의 나무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려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 고난의 장면을 죽음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으로 표현했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53:7).


속죄의 은혜 베풀려 고난의 현장으로
본문은 이사야가 예언한 말씀이 예수에게 이루어지고 있는 현장을 기록하고 있습니다(마26:57~58). 예수를 잡은 자들이 끌고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가니 거기 서기관과 장로들이 모여 있었는데 수제자인 베드로는 두려움에 가득 차 멀리서 바라만 보고 있습니다. 죽을지언정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한 것이 불과 얼마 전의 일인데 말입니다. 이런 호언장담을 신념이라고 합니다. 우리도 “나는 주를 위해 죽을 수 있다”고 하지만 막상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오거나, 감정이 상하는 상황에 처하면 예수 믿는 사람 같지 않게 달라집니다. 우리는 그런 신념과 감성에 빠지면 안 됩니다. 진짜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내 안에 계신 성령만이 주를 좇게 하고, 주를 위해 죽을 수 있는 믿음을 주십니다. 인간의 힘으로 되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결국 주를 모른다고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인간의 신념은 이 정도밖에 안 된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예수가 왜 대제사장 가야바의 뜰에 끌려가야 됩니까? 대제사장 가야바도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만든 피조물입니다. 그를 이 땅에 태어나게 했고 만물을 주어서 먹고살게 했습니다. 서기관과 장로들도 말씀 한마디면 살리고 죽일 수 있는 분이 왜 그들 앞에 끌려가야 합니까? 우리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께서 흘리신 피에 내가 영원히 구원받을 속죄의 은혜가 들어 있습니다. 이 은혜를 베풀기 위해 지금 끌려가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그토록 오랫동안 예언했던 은혜가 드디어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거짓증거를 찾으매 거짓 증인이 많이 왔으나 얻지 못하더니”(마26:59~60).

대제사장, 장로, 제사장, 서기관 등 유대인 대표 70인을 공회원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예수를 죽일 증거를 찾아 결정하면 번복할 수 없습니다. 공회에서 예수를 죽이려고 작정하고 있는데 살길이 있겠습니까? 대제사장도, 장로도, 서기관들도, 율법사들도, 바리새인들도 다 예수를 죽여야 한다고 생각하지 누구 하나 예수를 변호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예수께서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우리에게는 은혜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죽일 만한 증거를 찾지 못했습니다. 여러 사람이 예수를 고발하는 증인으로 나왔지만 결정적인 증거를 얻지 못했습니다. 어떤 두 사람이 와서 “이 사람이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 만에 지을 수 있다고 하더라”고 했지만 그 정도로는 예수를 죽일 수가 없었습니다.



죽음으로 몰고 간 예수의 고백
그때 대제사장이 또 묻습니다.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드디어 예수께서 죽을 명목이 나왔습니다. 이 말을 듣자마자 예수께서는 “네가 말하였느니라”, 즉 “그 말이 맞다”고 대답하셨습니다. 나사렛에 사는 요셉의 아들로 호적(戶籍)에 올라 있는 목수의 아들이라는 신분이 분명한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였으니 이제 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죽을 때를 기다리고 준비하셨던 것입니다.

성전을 헐고 3일 만에 짓겠다고 말했느냐는 장로와 서기관들의 심문에는 아무 말씀도 안 하시던 예수께서 신성을 모독한 죄목으로 죽어야 할 대목에 와서는 “네가 말하였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칭한 것이 사실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더 나아가 “내가 너에게 이르노니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절대 권세를 가진 하나님 우편에서 앉아 있는 것과 그리고 나중에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때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참람한 말을 하였으니 어찌 더 증인이 필요하냐. 이제 죽일 만한 죄가 분명하다. 보라, 너희가 지금 이 참람한 말을 들었도다.” 이제 드디어 예수를 죽일 죄를 찾은 것입니다. 율법에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고 했는데 예수가 “내가 하나님이다”라고 했으니 그들이 섬기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신성을 모독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성을 모독하는 자를 죽이는 것이 하나님께 충성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독자를 바치는 심정으로
창조자 하나님은 자기가 만든 피조물인 인간을 지옥 보내지 않기 위해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독생자는 자기가 죽어 인류에게 속죄의 은총을 주기 위해 고난당하며 죽음으로 향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얼마든지 안 죽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 고통을 가하는 대제사장과 장로, 서기관, 바리새인들을 살리고 죽일 권세가 있는 분입니다. 하지만 우리를 살리기 위해 죽기 위한 절차를 밟고 있는 주님의 모습을 볼 때, 주님을 향한 우리 사랑의 함량과 나를 사랑하는 주님 사랑의 함량은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가 노량진성전을 구입할 때 이런 설교를 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독자를 죽게 해서 나를 살리셨습니다. 그런 은혜를 받았다고 인정하는 사람만 노량진성전 구입을 위해 자기 독자를 바치는 마음으로 성전 건축에 참여합시다.” 우리가 독자를 바치는 믿음으로 신앙생활을 한다면 얼마나 예배에 마음을 쏟겠습니까? 얼마나 큰 감사를 드리겠습니까? 죽도록 충성하고 전도할 것입니다. 자식이 죽을 지경이 되었을 때 자식을 살리기 위해 부모는 무엇이든 하려고 합니다. 그런 심정으로 주님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못할 것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우리는 평생 충성하며, 감사하며, 순종하며 살아도 주님이 주신 은혜를 갚지 못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신앙생활조차 남의 일 하듯 합니다. 신앙생활은 내가 살기 위해 해야 할 ‘내 일’입니다. 내 영혼의 때의 신세를 위해 해야 할 ‘내 일’입니다. 신앙생활이 내 일이라고 여기는 사람에게 “예배 시간에 맞춰 오십시오. 예배에 빠지지 마십시오. 기도하고 충성하고 전도하십시오”라고 말할 필요가 있습니까? 자기가 알아서 신앙생활을 아무리 열심히 해도 갚을 길 없는 은혜를 받았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내 속에 절대로 잊을 수 없을 만큼 충격적인 은혜를 받지 못했기에 성경을 통해 전하는 애절한 말씀을 듣고도 금세 잊어버립니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우리 삶에서 1순위가 구속의 은혜에 감사여야 합니다.


내 죄를 담당하신 예수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예수의 시인으로 결정적인 증거를 찾은 대제사장은 이제 사람들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저는 사형에 해당하니라”고 합니다. 예수를 죽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예수의 얼굴에 침을 뱉습니다. 그리고 주먹으로 손바닥으로 때리면서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면서 조롱합니다. 이런 모욕과 조롱이 세상에 어디 있단 말입니까? 그런데도 주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때로는 죽은 자도 무덤에서 불러내고, 중풍병자도 멀쩡히 일어나서 걸어가게 하고, 물 위를 걸어가고, 자연 질서를 거스르면서 바람를 잔잔하게 하시고, 나병환자도 말씀 한마디로 고치시던 분이 왜 이렇게 잠잠히 모욕과 수치를 당하셔야 합니까? 나 위해서 죽기 위해서입니다. 내 죗값을 갚고 속죄의 은총을 주려고 잠잠하신 것입니다. 고난주간이 되면 제가 자주 부르는 찬양이 있습니다. “어린 양 예수 내 죄를 담당하사 원수들의 채찍에 온몸 찢기셨네. 외로움과 슬픔 홀로 담당하사 아버지의 노여움 날 위해 받으셨네. 아프고도 쓰린 눈물 홀로 흘린 주님이여. 주님 죽인 나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이 찬양을 부를 때마다 주님의 고난 현장에 서 있는 것처럼 느껴져서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고난 현장에서 지금 주님은 나에게 뭐라고 말씀하고 계십니까? “너희를 향한 나의 사랑을 잊지 말라. 나의 고난과 죽음이 너를 위한 것임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는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우리는 예수의 고난의 현장에서 멀찍이 지켜보다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하는 베드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제자들처럼 도망가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당하신 고통과 그 아픔, 매를 맞고 모욕과 조롱을 당하는 그 자리가 바로 나를 위한 축복의 현장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아는 것으로 끝나지 말고 예수께서 상하고 징계받고 저주받고 나무에 달려 피 흘려 고통당하고 부활하신 것을 내 것으로 가지라는 말입니다. 철없는 신앙 버리고 신앙생활 잘하길 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고난주간과 부활주일 주님 앞에 우리는 어떻게 감사해야 할까요? 어떻게 예배하고 어떻게 찬양하며 어떻게 주님께 은혜받은 자답게 감사를 표현해야 할까요? 고난주간부터 부활주일에 이르기까지 최상의 감사로 주님을 기쁘시게 합시다. 주님을 최고로 대우하는 절기가 되길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위 글은 교회신문 <620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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