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적 영적 생활1·③]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신앙생활

등록날짜 [ 2018-05-24 12:17:47 ]

신앙생활은 세상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최고의 가치
기분·감정·환경 따위가 흔든다고 그만둘 만큼 하찮은 것 아냐
 
영원히 살고 죽는 중대한 문제, 육신의 생각으로 결정해선 안 돼

 

영원히 죽고 사는 문제
제가 어린 시절 다니던 고향 교회의 성도님들이 우리 교회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중 어렸을 때부터 저를 봐 오신 어르신께서 “윤 목사, 어렸을 때 교회 간다고 아버지한테 그렇게 많이 맞았잖아. 그런데 한 번도 교회 안 간다고 말하지 않더니 이렇게 큰 교회 목사가 되었네”라고 말씀하십니다.

만약 돌아가신 제 아버지께서 공부를 하지 말라고 하셨다면 안 했을지도 모릅니다. 어떤 일 때문에 아버지께서 저를 벌거벗겨 밖으로 쫓아내셨다면 비록 창피스러운 일이지만 아버지 말씀대로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생활만큼은 절대로 양보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이 영원히 죽고 사는 문제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버티고 살아 봤자 얼마나 살겠습니까? 하지만 죽음 이후의 세계는 영원합니다. 주님 오시면 영원한 지옥 아니면 천국, 이 둘 중 하나인데 왜 예수 믿는 것을 그만두겠습니까? 지옥에서 당하는 고통은 아버지의 매보다 훨씬 더 고통스럽다는 것을 아는데 어떻게 믿음을 포기하겠습니까?

사실 당시의 핍박이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어린 저에게 이길 수 있는 믿음을 주셨다는 것이 은혜요, 축복입니다. 무엇보다 어렸을 때 천국과 지옥을 생생하게 본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다른 것은 다 뒤로 미룰 수 있어도 신앙생활은 뒤로 미룰 수 없는 삶의 최우선 순위였습니다.

신앙생활은 기분이나 감정, 주위 환경 따위가 흔든다고 해서 그만둘 만큼 자잘하고 하찮은 것이 아닙니다. 하기 싫다고 안 하고 그만둘 일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해야 되는 위대한 일입니다. 영원히 살고 죽는 중대한 문제가 달린 일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을 하다 말고, 열심을 내다 말고, 싫다고 그만두겠습니까?

육신의 생각으로 신앙생활을 결정한다는 것은 더더욱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라고 했습니다(롬 8:6). 육신은 언제나 내 육신이 편한 대로 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영혼에게는 결국 사망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생각은 신앙생활의 기준이 절대 될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의 기준이 환경이 되어서도 안 됩니다. 환경이 이렇게 나쁘니 어떻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겠느냐고 나를 합리화시키려 하지만 그 역시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최악의 환경이 어떤 것입니까? 그것이 핍박이라 할지라도 신앙생활을 하고 안 하고의 기준이 바뀔 수는 없습니다. 신앙생활은 한마디로 요지부동해야 합니다.

한계가 있는 ‘나’라는 인격 안에서 신앙생활의 희로애락을 조절하려 들지 마십시오. 아니 이 우주 안에 있는 어떤 것으로도 자기 신앙생활의 희로애락이 조절되어서는 안 됩니다. 나 스스로 살 수 있다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것을 알고 그것을 소유함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그것을 누리는 것을 최고의 행복으로 소유해야 합니다. 

빵과 다이아몬드
솔로몬의 영광이 그 시대에 대단했던 모양입니다. 그 명성이 얼마나 대단했으면 스바 여왕이 은, 금을 가지고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 한마디를 듣기 위해서 찾아왔겠습니까? 예수께서는 그런 솔로몬을 언급하시면서 “나는 솔로몬보다 큰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2:42). 다시 말해서 솔로몬의 지혜로운 소리를 듣기 위해서 스바 여왕이 와서 머리를 조아리며 그 소리를 들으려고 사정했다면, 솔로몬보다 더 큰 소리를 하고, 더 지혜로운 소리를 하고, 더 생명이 넘치는 소리를 하고 있는 예수께는 왜 오지 않느냐는 말입니다. 솔로몬의 영광은 아무리 찬란해도 들에 핀 백합화 하나만도 못하다고 하셨는데(마 6:29), 솔로몬의 영광보다 더 위대하고 찬란한 영광의 목소리와 축복이 예수께 있는데 왜 예수께로 오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주시는 영광과 축복이 무엇입니까? 바로 우리 죄를 사하시고 영원한 천국에서 살 수 있는 하늘나라를 주신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아들이 오셨는데 왜 그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느냐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의 분명한 영적 가치를 안다면 그 가치를 창출하고 추구하고 소유하기 위해서 계속 전진해 나갈 것입니다.

우리가 영생으로 주님 앞에 서는 날 면류관과 위대한 상의 영광이 찬란하게 빛나기 위해서는 이 땅에서 그 가치를 분명히 알고 내가 손에 쥔 것이 과연 육의 것인지 아니면 영적인 것인지를 분명히 판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에 지는 이유는 세상의 가치와 영적인 가치를 잘 비교하지 못하고 선택하기 때문입니다.

아주 큰 다이아몬드와 맛있는 빵이 있는데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을 생각해 봅시다. 아마 배고픈 어린아이라면 빵을 선택할 것입니다. 어려서 경제적 가치를 모르기 때문에 당장 배부르게 하지는 못하지만 엄청나게 값나가는 다이아몬드는 버리고 당장 배고픈 것을 해결해 주는 빵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이와 똑같이 영적인 세계가 있고, 영원한 천국과 영생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많은 기독교인이 이 땅에서의 삶을 우선합니다. 말은 하늘의 신령한 ‘다이아몬드’가 최고라고 인정하는데, 손은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빵’으로 가고 있습니다. 빵 때문에 영원히 살 생명을 쉽게 버리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손에 무엇을 쥐고 있습니까? 육신의 요구대로 살지 마십시오. 육신대로 사는 사람은 육신을 행복하게 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자기에게 가장 큰 행복이요, 축복인 줄 압니다. 그러나 성경은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롬  8:13)라고 했습니다. 내 속에 있는 성령의 권세로써 육신의 소욕을 죽이십시오.

우리는 너무나 허망하고 가치 없는 것에 잘 속습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가치 없는 것에 유혹되지 말고, 영원히 가치 있는 것을 꼭 움켜쥐고 후회 없는 영적 생활할 수 있는 복된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576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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