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적 영적 생활1·⑧] ‘참빛’ 되신 예수와 ‘어두움’의 주관자 마귀

등록날짜 [ 2018-06-28 18:55:10 ]







빛을 가리는 어두움
세상 사람들이 빛이라고 할 때는 태양, 전기, 촛불, 반딧불, 별빛, 모닥불 등의 빛을 떠올립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자신이 빛이라고 했습니다. 또 세상 사람들은 진리라는 말을 ‘옳은 도리’ 정도로 알아듣습니다. 삶 속에서 인격적으로 흠이 없이 살아가는 것, 다시 말하면 옳은 일만 하고 옳은 도리를 행하는 것을 진리라고 생각합니다. 생명이라는 말도 세상에서는 70년, 80년 살다가 가는 육신의 목숨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자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요 14:6).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를 말씀하셨기에 세상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독특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신 빛이 무엇인지, 진리가 무엇인지, 생명이 무엇인지를 모르면 당연히 예수 믿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기 마련입니다. 그 말씀의 뜻을 모르니 마음을 팍 쏟아서 예수를 믿으려 하지 않고 적당히 믿으려고 합니다. “뭐, 그렇게까지 믿을 필요가 있느냐? 이 정도면 되지 않느냐?”라고 하면서 자기 상식선에 신앙생활을 올려놓습니다.

마귀는 ‘어두움’이라고 하는 무기를 사용합니다. 이 어두움은 전기 불이 꺼졌거나 태양이 저물어 밤이 되었을 때 혹은 촛불이 꺼졌을 때의 상태가 아닙니다. 어두움은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모르게 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안 받으면 우리가 어떤 존재가 되는가를 모르게 하는 어두움입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해야 할 필요성을 모르게 하고 매사에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영적인 유익이 무엇인지 모르도록 끝까지 가로막습니다. 그래서 마귀를 어두움의 주관자라고 부릅니다.

이 어두움이라는 것은 참 해볼 수가 없습니다. 중고등부 학생들에게 공부 열심히 하라고 해 보십시오. “내 인생 내가 알아서 살아요. 간섭하지 마세요”라고 대들 듯이 대꾸합니다. 부모는 자식이 성장한 다음에 어떻게든 밥 벌어 먹는 일에 어렵지 않도록, 세상 사는 일에 힘들지 않도록 만들어 주고 싶은데 당사자인 자식은 그 심정을 모릅니다. 부모 눈에는 자식이 고집부리고 철없이 행동할 때 망할 것이 뻔히 보이는데 자식은 어두워서 전혀 모르는 것입니다.

‘어둡다’는 말은 ‘철없다’는 말입니다. 마귀는 우리를 영적으로 철이 없는 자로 만듭니다. 마귀가 하는 일을 어디다가 핑계 댈 수 있겠습니까? 과연 그것을 새카맣게 모르게 하는 놈이 누구입니까? 성경을 기록해 놓으시고, 모든 사람이 성경을 다 읽고 볼 수 있도록 만드시고, 목사가 설교하게 만들어서 도저히 모를 수 없도록 해 놓았는데 몰라서 그랬다고 변명하겠습니까? 몰라서 그랬다면 이것만큼 답답한 것은 없습니다.


어두움을 분별하라
아버지로부터 자기 분깃을 얻어 집을 떠난 탕자가 그 재산을 다 탕진하고 낭비한 다음에 ‘큰일 났구나. 내가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무슨 염치로 집에 돌아가겠느냐. 그러나 우리 아버지 집에는 양식이 많은 품꾼이 많으니 단지 나를 품꾼의 하나로 써 달라고 하고 밥이나 실컷 먹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자기 생각에서 나오는 빛은 거기까지밖에 못 미칩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밤잠을 못 자고 매일 대문 앞에서 언젠가는 다 낭비하고 탕진하고 거지꼴이 되어서 돌아올지도 모를 그 자식을 기다립니다. 하지만 탕자는 그런 아버지가 안 보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볼 수 있었다면 처음부터 안 나갔을 것입니다. 집을 나가려고 할 때도 아버지는 “너는 아직 나가면 안 된다. 나가면 타락한다. 너는 아직까지는 독립할 수 없다”라며 아들을 설득했을 것입니다.

아버지가 나가지 말라고 할 때 만약 아들에게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는 빛이 있었으면 집을 안 나갔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벌써 망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탕자는 자기가 나가면 성공할 줄 알았습니다. 재산을 창기와 먹어 버리고 마음껏 탕진할 때는 수많은 사람이 그를 따랐습니다. 잠시 후에 자기가 갖고 있던 돈이 다 떨어지자 아무도 그를 거들떠보지 않았습니다. 곧 돼지 쥐엄 열매를 먹으며 주린 창자를 움켜쥐며 고통당할 자신의 모습을 전혀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이 없는 것도 어두워서 그렇습니다. ‘그렇게 한다고 되겠어? 기도한다고 되겠어? 믿는다고 되겠어? 그거 안 돼’라고 단정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도와주시려고 “무엇이든지 내 이름으로 구하라. 시행하리라. 믿음 안에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 믿고 구한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고 해도 안 믿습니다.

신앙생활 하다가 시험에 드는 것도 어두워서 그렇습니다. 시험하는 자가 누구입니까? 바로 마귀인데 마귀에게 속으면 시험에 듭니다. 그리고는 누구 때문에, 무엇 때문이라고 핑계를 댑니다. 영적으로 어두우니까 눈으로 보이는 것만 생각하지, 보이지 않는 마귀의 궤계를 못 봅니다. 그래서 이 마귀는 어두움을 이용하여 믿음에서 타락시키고 신앙생활에 열심을 내지 못하게 합니다.

기도해야 할 필요성을 못 느낀다면 기도할 필요성을 모르게 하는 어두움의 주관자, 마귀역사가 뒤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전도해야 할 필요성을 못 느낀다면 한 사람이라도 지옥으로 더 데려가려는 마귀역사가 우리를 어둡게 하기 때문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어디 있냐면서 죄를 범하고, 내 마음대로 사는 것도 어두움 때문에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보고 계시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마귀가 주는 어두움의 손아귀에 붙들린 결과입니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581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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