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적 영적 생활1·⑪]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는 비결

등록날짜 [ 2018-07-25 15:42:39 ]

내 믿음의 겉과 속이 다르면
힘든 일 앞에 주님 원망하게 돼
자기 타락과 잘못 변명하지 말고
엄히 다뤄야 버릇 고칠 수 있어
어떤 경우라도 무너지지 않는
주님 향한 절대적 신뢰 있어야

 

하나님을 원망하게 하는 마귀
우리가 영적 싸움에서 패배하지 않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무너지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신뢰감이 있어야 합니다. 이 신뢰가 곧 믿음입니다. 그런데 잘 믿는다고 하는 성도들도 그 행동은 다를 때가 많습니다. 겉과 속이 다릅니다. 겉과 속이 다른 이중성은 어려운 일에 부딪히면 금방 드러납니다.

예수 잘 믿는다는 사람 중에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목사님! 목사님! 큰일 났습니다. 내가 주님 앞에 얼마나 충성했는데 우리 집에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습니까?”라고 원망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과연 이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인가 하는 의심이 듭니다. 자기 나름대로는 그 일이 큰 걱정이겠지만 왜 그런 불행한 일을 주님이 그 가정에 주셨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성경 역사 속에 단 한 번도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고의로 고통을 주신 사실이 없습니다. 다만 훈련을 시키기 위해서 연단하시기는 하셔도 고의로 미워서 고통스럽게 하신 적은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불행을 짊어지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을지언정 불행한 일을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런데 왜 우리의 불행을 뒤집어쓰고 죽으신 그분에게 우리의 불행을 또 뒤집어씌우는 것입니까?

그러면 과연 누가 그런 고통을 주는 것입니까? 바로 마귀가, 사단이, 귀신이 죄를 통해서 고통을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슨 일이 안 되거나 무슨 일을 하다가 좌절되거든 즉시 ‘이놈이 나를 믿음에서 떨어지게 만드는구나! 하나님을 원망하게 만드는구나!’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악한 사단아,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떠나가라!” 하고 기도하며 이겨야 합니다.

고통과 어려움을 당할 때 하나님이 계시면 이럴 수가 있느냐고 원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원망하는 대신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이런 큰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고 바꿔서 생각하기 바랍니다. 어떤 문제와 고통과 어려움을 당하거든 이제 나에게 신령한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십시오. 기도할 수 있는 기회, 내가 믿음을 보일 수 있는 기회, 주님이 역사하실 신령한 기회가 왔다고 말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신령한 기회를 현실로 만든다면 그 사람이 얼마나 복된 사람입니까?


타락을 변명하도록 속이는 마귀
세상에서 제일 미련한 사람이 자기 타락을 대변하려는 자입니다. 교회에서도 어떤 일을 놓고 왜 그렇게 했냐고 말하면 이러고저러고 해서 그럴 수밖에 없었으니 이해해 달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왜 십일조를 안 하냐고 물어보면 선은 이렇고 후는 이래서 앞으로 일 년 후부터 십일조를 내겠다고 말합니다. 전부 환경 탓, 조건 탓, 경제 탓으로 돌리고 자기는 빠져나오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타락과 자기 잘못을 남들이 이해해 주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남에게 변명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내가 내 사정을 제일 잘 아는데 누구에게 나를 이해해 달라고 하고, 누구에게 나를 변호합니까? 오히려 남에게는 관용을 베풀지라도 자신에게는 엄격하여 자신의 타락과 잘못을 용서할 수 없어야 합니다. “나는 절대로 타락을 용서할 수 없다”고 모질게 자신을 다그쳐야 그 버릇을 고칠 수 있습니다.

삼일예배에 안 나오고, 금요철야예배에 안 나왔는데도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못 느끼고, 영적으로 주린 것도 못 느끼고, 하나님 앞에 미안함도 없다면 큰 문제입니다.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축복하시고 나의 영적 생활을 도와주시려고 삼일예배도 만들고, 금요철야예배도 만들고, 새벽예배도 만들고, 주일예배도 만들었는데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살살 피해 다니는 것은 아주 미련한 행동입니다. 그렇게 핑계 댈 수밖에 없는 논리와 조건을 만드는 자가 누구입니까? 그렇게 할 수밖에 없도록 생각을 조작하고 만드는 놈이 누구입니까? 바로 사단의 역사, 마귀역사입니다.

우리 하나 타락한다고 하나님이 아쉬울 것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육신을 입고 있는 동안은 우리가 타락할까 봐 노심초사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기회는 오직 육신의 때뿐입니다.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죄 문제, 돈으로도 권력으로도 힘으로도 그 어떤 것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살면서도 “너 이놈아, 왜 이렇게 살아?” 하고 자기를 나무라거나 야단치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이 권면하면 “꼭 그렇게 믿어야 됩니까?”라고 하니 이런 사람과 어떻게 상대가 되겠습니까? 죽기로 작정한 사람에게 아무리 죽지 말라고 말한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절대로 자신의 잘못과 타락을 합리화시키지 말고 변명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마귀역사는 언제든지 합리적이고 합법적이고 논리적입니다. 그러다 결국 나중에 가서는 나 자신만 망치고 맙니다. 우리는 정신을 바짝 차려서 그 덫에 걸리지 말고 믿음으로 승리해야 합니다. 예수께서도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은 마귀역사, 질병의 역사, 환경의 고통, 수많은 문제, 염려와 근심, 그리고 저주와 죽음으로 꽉 차 있음에도 불구하고 행복할 것이라고 속입니다. 그 안으로 들어가면 갈수록 염려, 고통, 문제, 원망, 시비만 더할 뿐입니다. 가면 갈수록 행복은커녕 죽을 때까지 고통만 더합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 평생을 행복하게 살아 보겠다고 한다면 천만의 말씀입니다.

이 행복하지 못한 세상 속에서 행복할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은 오직 예수로 사는 것이요, 믿음으로 사는 것이요, 영적으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말로 이 세상에 영혼의 때를 위해 살 수 있는 기업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이며 큰 행복인지를 알고 그 복을 소유하며 살기를 바랍니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584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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