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적 영적생활1·⑮] 하나님 말씀으로 죄를 분별하고 예수 피로 해결하라

등록날짜 [ 2018-08-20 11:25:19 ]

죄를 깨닫지 못하면 해결할 수 없지만
일반 상식이 아닌 성경을 기준 삼을 때
죄 실상 발견하고 회개로 해결 가능해

인격의 세 요소인 지성·감성·의지가
타락하면 육신의 정욕이 나를 이끌어 가
성령이 인격 붙드시도록 성령 충만해야

 

바늘 도둑 소도둑
죄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예수의 피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예수의 피가 능력 있다고 해도 내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알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배고픈 거지가 주머니에 돈이 있는데도 밥을 사 먹을 줄 몰라서 굶어 죽었다면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가 마귀에게 당하는 모든 것이 죄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해서 예수의 피로 죄를 해결하지 못했다면 이보다 더 분하고 억울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죄는 내 힘으로 아무리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습니다. 알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발견해야 합니다. 하얀 수건에 먹물이 한 방울 딱 떨어지면 눈에 띄기 때문에 금방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새까만 수건에는 검정 물이 아무리 떨어져도 모릅니다.

성령이 충만하여 거룩하게 살려고 몸부림치는 사람들은 죄를 짓는 순간 마치 흰 수건에 검정 물이 떨어진 것처럼 예민하게 압니다. 그 죄 때문에 괴로워합니다. 즉시 그 죄를 해결해야 속이 시원합니다. 그러나 죄에 찌들어 사는 사람은 어지간한 죄는 알지도 못할 정도로 감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에서 목사가 죄를 말할 때마다 자신의 죄를 발견하여 해결해야 하는 것입니다.

죄는 일반 상식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 속으로 깊이 들어가야 알고 이길 수 있습니다. 성경에 남을 미워하기만 해도 살인한 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누가 나에게 미운 짓을 하면 대번에 그 사람이 밉습니다. 내가 싫어하는 행동을 하면 못마땅합니다. 눈으로 보고 내 마음에 안 들면 비판부터 합니다. 내 생각과 내 판단은 온전하지 못한데도 생각한 대로 함부로 판단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누구든지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성경은 남자와 여자를 보고 마음에서 음욕만 품어도 간음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일반 상식의 기준으로는 죄를 발견할 수 없지만 성경이라는 기준으로 보면 죄가 보입니다. 이렇게 죄가 보이기 때문에 예수의 피로 죄를 해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겉으로 드러난 죄뿐 아니라 감정 속에서 유발되는 죄까지도 해결할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영적으로 더 깊이 들어가고, 하나님과 신령한 관계를 가지기 원한다면 죄를 민감하게 다룰 수 있어야 합니다. 죄는 죄에 대해 민감해야 분별할 수 있고, 알아야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으로만 죄를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바른 지성이 앞장서게 하라
우리의 인격은 지정의로 되어 있습니다. 인격 중에서 가장 확실하고 분명한 기능을 가져야 할 기능이 지성입니다.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서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왜 사는가?”, “무엇 때문에 사는가?”, “내 인생은 어디로 가는가?”, “내 삶의 결과는 무엇인가?” 하는 지식이 확고부동하지 못하면 평생 동안 감정에 이끌려 살아야 합니다.

중·고등부 학생들이나 대학생들 중에는 그저 노는 것만 좋아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공부가 인생의 전부냐고 말하면서 껄렁거립니다. 이것은 지성이 올바르게 확립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간섭을 받는 것이 싫다고 하는 자체가 지성이 타락한 결과입니다. 지성이 타락하니까 망하는 일이 그렇게 좋고, 기뻐해서는 안 될 일에 기뻐하고 희희낙락거립니다.

노름꾼들을 보면 “이번에 본전만 찾으면 손 씻는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다가 더 많은 돈을 잃기도 하지만 본전을 다 찾을 만큼 딸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럴 때 그만두겠다는 마음은 사라지고 “기왕에 딴 것 싹 쓸어 모으고 그만두자”라고 지성이 바뀐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노름의 유혹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근본적으로 수고하고 땀 흘려서 먹고살겠다는 경제 윤리가 없습니다. 완전히 지성의 타락입니다.

어떻게 하면 인격을 균형 있게 조절할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 우선 감성 이전에 지성이 앞장서서 해석을 분명히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감성이 앞서서 이미 일을 저질러 놓은 상태에서는 나중에 잘못했다고 깨달아도 때는 늦습니다. 제일 먼저 지성이 앞장서서 이것이 옳은지 그른지 판단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감정을 버리고 깨끗한 지성에서 판단한 뒤에 감정이 따르고 의지가 따라야 합니다.

설교를 들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일 먼저 하나님 말씀을 듣고 “옳구나. 그렇구나. 아멘” 하면서 지성이 표현됩니다. 그리고 뒤에 가서 “참 감사하구나!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 내가 주님 뜻대로 살아야겠다” 하면서 감성과 함께 의지가 생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지성, 감성, 의지의 3단계를 거쳐 결정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순서가 바뀌어서 감정이 지성보다 앞서게 되면 문제가 생깁니다. 기분 나쁘고 속상한 감정 때문에 옳고 그름을 잘 판단하지 못하고 타락한 지성이 나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타락한 감성이 지성과 의지를 이끌어 가지 못하도록 나를 잘 살펴야 합니다.

순간적인 감정 대립 때문에 교회를 떠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렇게 나가서 굉장히 후회를 하지만 다시 돌아오고 싶어도 돌아오지 못합니다. 바로 체면 때문입니다. 나를 교회 밖으로 끌고 나간 것도 감정이고, 다시 돌아오는 일을 가로막는 것도 감정입니다.

영적인 유익을 위해서라면 우리는 체면도, 감정도 이길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감정이 함부로 나를 끌고 다니지 못하도록 먼저 올바른 지성이 앞장서게 하십시오. 그러려면 오직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성령 충만은 내 인격이 그분에게 압도당하여 타락하지 않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판단하고 성령으로 감정을 조절하고 성령으로 뜻을 정하는 것이 성령 충만입니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588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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