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적 영적 생활1·⑲] 마귀는 나를 한 번에 넘어뜨리지 않는다

등록날짜 [ 2018-09-20 10:15:35 ]

큰 나무를 자르기 위해 수차례 톱질하듯
마귀는 믿음을 서서히 흔들어 무너뜨려
신앙에 싫증 나고 기분 나쁜 일 생겼다면
빨리 믿음의 현주소 발견해 회개해야

‘욕심’은 내 영혼을 망치는 일등 원수
시험에 드는 건 욕심에 이끌렸기 때문

 

서서히 함락시키는 마귀
큰 나무를 톱으로 벨 때를 생각해 봅시다. 조금씩 조금씩 톱질을 해 가면서 그 나무가 넘어질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 쓰러뜨립니다. 나무에 톱이 닿기 시작하는 순간에, 그 나무가 아무리 크다고 해도 이미 넘어진 것과 같습니다.

마귀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이 아무리 훌륭한 신앙을 가졌다고 해도 악한 마귀가 한번 그를 넘어뜨리려고 작정한 궤계에 조금씩 조금씩 자신을 내주다 보면 결국 겉은 멀쩡할지 몰라도 그 속의 신앙은 무너지고 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작부터 마귀가 우리의 믿음을 톱질하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마귀가 우리 속에 들어와서 작전을 세울 때는 아주 여러 번에 걸쳐서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준비를 합니다. 처음부터 “야! 너 교회 가지 마라! 예수 믿지 마라!” 하고 단번에 들어오는 것이 아닙니다. 갑자기 대놓고 신앙생활 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습니다. 밀물이 서서히 들어와서 순식간에 물이 차듯이, 벌써 그놈이 슬며시 자리 잡은 그때부터 이것저것 약점을 건드려 가면서 차츰차츰 나를 함락시키고 장악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싫증 나는 일이 생기고, 저기서 기분 나쁜 일이 생깁니다. 이 일도 의욕이 떨어지고, 저 일도 못할 이유가 생기고, 교회 모든 일이 다 싫어집니다. 한참 후에 가서야 어느 순간 ‘그렇게 겸손하고 열심히 충성했던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는가. 이 모습이 내가 아닌데…’ 하며 자기 신앙의 현주소를 발견하게 됩니다.

마귀역사가 이미 나의 믿음과 충성과 기도 속에 들어오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속에 작정하고 들어와서 한참 동안 장악하고 있어도 우리는 전혀 모릅니다. 설교를 들으면서, ‘아, 내가 신앙생활에 많이 게을러졌구나. 열심히 해야겠구나!’ 하고 생각은 하지만 그것으로 끝입니다. 마귀는 그 생각대로 행동하게 놔두지 않습니다. 그 생각을 계속 장악하여 더는 움직이지 못하게 만듭니다.

호랑이가 토끼를 잡을 때를 보십시오. 호랑이는 낮은 포복으로 몸을 숙이고, 소리도 내지 않고 살짝 다가갑니다. 토끼 제까짓 것이 얼마나 뛰겠느냐고 얕잡아 보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토끼를 사냥할 수 있는 거리 안에 들어오면 재빨리 두 발로 토끼의 몸을 잡아채는 동시에 목뼈를 꽉 물어 버립니다. 작은 토끼를 잡는데도 그렇게 신중합니다.

마귀는 우리를 죽이고 멸망시키는 일에 토끼를 사냥하는 호랑이보다 훨씬 더 철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생활 하는 일에 작게 여길 만한 어떤 것도 강력하게 대처해 이겨야 합니다. 아무리 작은 병도 그것이 점점 커지면 사람을 죽이는 것처럼 아무리 작은 일도 그것이 커지면 나를 믿음에서 넘어뜨리고 신앙생활에 심각한 문제를 가져옵니다. 세상이 나를 뒤집어씌우려고 할 때부터 박차고 일어나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고 좌절하고 주저앉으면, 아무리 설교를 듣고 잘해야지 다짐해도 나를 일으켜 세우지 못합니다.

“환경 때문이다, 피곤 때문이다”라고 이유를 대지만 그 전에도 그런 환경이 있었고, 그 전에도 그런 피곤이 있었습니다. 그 전에는 그런 환경과 피곤에 얽매이지 않고 열심히 했는데 지금은 그렇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 신앙생활이 적에게 점령당하고 있구나!’ 생각하고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모르면 완전히 당하고 맙니다. 성경이라는 안경을 통해 서서히 나를 함락시키고 지배하고 있는 마귀역사를 보십시오. 마귀에게 끌려 들어간 수렁 같은 그 속에서 나를 건져 내고 일으켜 세워서 자유를 주실 분은 예수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욕심의 약점
사람은 무엇인가 좋은 것을 보면 가지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한번은 아라비아 숫자가 선명한 시계를 보았는데, 그것을 하나 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계를 슬쩍 보기만 해도 몇 시인지 쉽게 알 수 있어서 설교할 때 좋겠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제가 그 상황에서 한 발짝 물러나서 생각해 보니 ‘시계가 있는데 왜 또 사려고 하지?’라는 의문이 생깁니다. 당연히 그것이 욕심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제 속에서 어느새 욕심이 가라지처럼 슬며시 올라온 것입니다.

우리는 무언가를 ‘가지고 싶다’는 마음이 생길 때마다 그것을 가져서 나에게 어떤 유익이 있는가 하는 판단을 해야 합니다. 그냥 갖고 싶다는 이유뿐이라면 그것은 욕심입니다. 한번 그 생각에 점령당하면 기어이 가져야 하는 것이 욕심입니다. 그것이 내게 어떤 도움을 주는지, 이미 나에게 있는데 왜 또 사야 하는지 판단해 봐야 합니다.

요새 아이들은 유명한 배우나 가수들이 방송에 입고 나왔던 옷을 갖고 싶어 합니다. 엄마에게 사 달라고 졸라서 어떻게든 그것을 소유하는 아이들을 볼 수 있습니다. 어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눈으로 보는 것들이 얼마나 많이 나의 신앙생활을 방해하고 영적생활을 방해하는지 모릅니다. 눈으로 본 것을 ‘나도 저거 한번 가져 봤으면’ ‘나도 저렇게 한번 해 봤으면’이라고 생각한 후에 그것들이 마음속에 욕심으로 들어와서 자리를 꽉 잡습니다. 그러다 결국 그것이 삶의 목표가 된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그런데 이것이 하나님 앞에 심판받을 죄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사람이 시험에 드는 것은 욕심에 이끌렸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1장 14절에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라고 했습니다. 그 뒤에 바로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고 했습니다. 욕심이 신앙생활을 망치고 결국 내 영혼을 망치는 원수인 것을 모르고 쓸데없는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됩니다. 그 쓸데없는 욕심이 화근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근성이 내 안에 들어 있거든 큰일로 여기고 당장에 유산시켜 버려야 합니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592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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