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안에 행복한 우리 집

등록날짜 [ 2004-06-09 13:58:54 ]

1992년 7월, 대학교 후배인 희정이가 자기가 다니는 교회에서 3박4일 동안 놀러 가는데 같이 가면 후회하지 않을 거라고 해서 경기도 마석 기도원에서 열리는 연세중앙교회 하기산상성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그러나 찜통 같은 더위에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설교를 아침 저녁으로 듣고 앉아 있는 나 자신이 참 한심스럽다는 생각이 들어서 도중에 돌아가려고 했지만 희정가 언제나 같이 다니면서 친절하게 대해주었기 때문에 끝까지 있게 되었다. 그리고 성회 삼일째 되던 날은 혹시 계실지도 모르는 하나님께 기도를 했다. “하나님, 저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제 맘대로 살아본 적이 없어요. 대학에 들어가서 이제 겨우 자유하게 되었는데 교회에 다니면서 다시 억압받고 싶진 않아요. 멋있게 연애도 하고, 결혼해서 아기도 낳고, 그리고 여유가 되면 주일날 가족들의 손을 잡고 교회에 나올게요”

그런데 설교시간이 되어서 강사이신 윤석전 목사님의 설교 말씀을 가만히 들어 보니 방금 전에 내가 기도한 것과 똑같은 내용으로 설교를 하시는 것이 아닌가? 누군가가 나의 생각과 마음까지도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에 너무나 놀란 나머지 그만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말았다. 설교가 끝나고 통성기도 시간이 되자,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믿지 않은 죄에서부터 20년 동안 살면서 지은 죄들을 생각나는 대로 회개하기 시작했다. 그 때, 예수님이 내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것이 분명하게 믿어져서 눈물을 흘리며 기도를 하다가 방언은사를 받았다. 그리고는 세상에서는 느낄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는 평안과 기쁨을 체험하게 되었다.

성령을 받기 전에는 누가 천국과 지옥에 관해 아무리 실감나게 이야기를 해도 마음에 와 닿지가 않았다. 그러나 성령을 받고 진리가 무엇인지를 깨닫는 순간, 착하게 산다고 해서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예수를 믿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나의 마음은 기쁨으로 충만했고, 내가 체험한 이 소식을 내가 가장 사랑하는 우리 가족들에게도 알려서 그들도 나와 같이 구원받게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슴이 벅찼다.
그러나 막상 가족들에게 예수 믿자는 말을 꺼내려고 하니 오랫동안 불교를 떠받들듯이 믿어 온 분들이라 혹시 나마저 교회에 못가게 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6개월 동안 혼자서만 몰래 교회에 다녔다. 그런데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마다, 기도할 때마다 사랑하는 가족들이 지옥 불꽃 가운데서 그 두렵고 참혹한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광경이 머리 속에 떠올라서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아 하나님께 울부짖으며 내 가족을 살려 달라고 기도했다.

그렇게 6개월이 지날 무렵, 주일 대예배 시간에 담임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서 생생하게 들려오는 주님의 음성은 ‘어찌 이 좋은 구원을 너 혼자만 소유하고 가족이나 이웃들에게 전하지 않느냐’는 책망의 말씀이었다. 통성 기도시간에 회개를 하며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할 능력을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예배를 마친 후 굳은 결심으로 대문의 초인종을 눌렀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날이 1년에 두세 번 있는 가족회의 날이었다. 아버지의 사업이 어려워지니 이럴 때일수록 온 가족이 마음을 합하자는 내용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내가 예수를 믿고 있다는 것과, 우리 가족이 천국에서 영원히 함께 살기 위해서는 가족 모두가 꼭 예수를 믿어야 한다는 말씀을 드렸다. 평소에 부모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법이 없던 내가 갑자기 선포 아닌 선포를 하는 바람에 가족들이 모두 충격을 받고 할 말을 잃으셨다. 어머니께서 “가족이 마음을 합해도 아버지의 사업이 잘 될까 말까 한데 한 가정에 두 종교를 가져서는 집안이 잘 될 수 없으니 교회에 다니지 말라”고 하셨다. 나는 다시 한 가정에 두 가지 종교가 안 된다면 다같이 예수를 믿자고 어머니를 설득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20년 이상 다닌 절을 포기하는 것이 쉽겠느냐, 아니면 겨우 1년도 안 다닌 교회를 포기하는 것이 쉽겠느냐며 오히려 나를 설득하셨다.

그 때부터 가족들의 핍박이 시작되었다. 그 당시에 나는 성가대원이어서 아침 7시면 소리없이 준비를 하고 집을 나서야 했는데, 어쩌다가 어머니와 마주치는 날이면 머리채를 휘어잡히고 “너 때문에 집안에 되는 일이 없다!”고 두들겨 맞아야 했다. 아버님께서도 나 때문에 사업이 어려워졌다는 생각을 하셔서 그런지 그날 이후로 나에게 한 마디 말씀도 건내지 않으시고, 똑바로 쳐다보시지도 않으셨다. 차라리 두들겨 맞고 욕설을 듣는 편이 낫지 아버지와의 냉전은 정말 견디기 힘들었다. 이렇게 교회 문제로 집안에 분란이 끊이지 않자 오빠는 성경책을 갈기갈기 찢어 던지며 “너 때문에 도무지 집안이 조용한 날이 없으니 짐을 꾸려 당장 집을 나가라!”고 했다. 가족의 냉대와 핍박은 정말 견디기 힘들었다. 그러나 핍박을 당하더라도 가족들 곁에 있어야 가족들의 영혼을 더 불쌍히 여기게 되고 더 간절히 기도하게 된다는 희정이의 말이 생각나서 끝까지 참고 견뎠다.

시간이 흐르고 해를 거듭할수록 아버지의 사업은 날로 더 어려워졌다. 아버지께서는 새벽 3-4시까지 술을 드시지 않으면 잠을 이루지 못하실 지경이 되셨고, 어머니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더 열심히 절에 다니셨다. “이번 부도를 막지 못하면 길거리에 나 앉게 될 거야”라며 어머니께서 근심하실 때마다 나는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실 것이니 걱정 마세요”라고 큰소리를 쳤다. 그리곤 얼른 발걸음을 교회로 옮겨서 기도를 했다. “하나님, 우리 가정이 당하는 이 어려움이 하나님을 만나는 계기가 될지언정 절대로 부도가 나서 가족이 흩어지는 일이 없게 해주세요!” 하나님께서는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때마다 부도를 막아주셨다. 어머니도 나의 기도가 응답되는 것을 보시고는 조금씩 마음의 변화를 보이셨다.


가족의 냉대와 핍박 속에 3년여의 세월이 흐른 1995년 여름이었다. 주일날 아침 교회에 가려고 집을 나서는데 동생 희주가 나를 따라 나서는 것이었다. 내가 전도할 때마다 언니나 열심히 다니라고 핍박에 합세하던 동생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변화시켜 주셨던 것이다. 그러나 얼마간 신앙생활을 하던 희주가 다시 세상 유혹에 빠져 주님 곁을 떠나 방황할 때, 나의 마음은 찢어지듯 쓰리고 아팠다.
내가 결혼을 하고 연세중앙교회 근처에 신혼살림을 차렸을 무렵, 희주는 어렸을 때부터 앓았던 심장판막증세가 갑자기 악화되어 종합병원에서 정밀 검진을 받게 되었다. 검진 결과, 수술을 해도 고칠 수가 없으니 계속 약을 먹다가 더 나빠질 때마다 병원에 와서 치료받으라고 했다. 너무나 충격적인 결과에 가족들은 말이 없었다.

나는 신랑과 의논한 끝에 희주를 우리집으로 데리고 와서 신랑과 교대로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것은 바로 너를 위한 것이니 어서 주님의 품으로 돌아가자”며 눈물로 설득했다. 또 희주도 잘 알고 있던 워십 성극실 언니에게도 희주를 설득하는 일에 협조를 구했더니 함께 기도해 주었다. 희주는 다시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을 섬기게 되었고 워십 성극실의 한 지체가 되어서 활동하게 되었다.

1998년 3월, 89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정정하시던 할머니께서 갑자기 돌아가셨다는 부음을 받았을 때에 나는 온 몸의 힘을 잃고 말았다. 내가 가족 구원을 등한히 하는 동안에 사랑하는 할머니가 구원받지 못하고 돌아가셔서 영원히 고통당하실 것을 생각하니 아무런 말이 나오지 않고 눈물만 흘러내렸다. 나와 희주는 이제라도 가족의 구원을 위해 세월을 낭비하지 말고 기도하고 전력을 다해 전도하자고 마음을 모았다. 그래서 주일예배에 오빠를 초청하기로 했다. 할머니의 장례를 치르면서 구원과 영생의 문제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된 오빠는 의외로 순순히 예배 초청에 응해주었다. 그러나 찬양을 할 때나 담임 목사님께서 전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는 머리가 아프고 속이 매슥거리다며 도중에 나가버렸다. 그리고는 담임 목사님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비판을 했다. 그러나 우리는 포기하지 않고 교회 설립 12주년 기념감사예배 때에 다시 오빠를 초청했다. 감사예배 행사 프로그램 중에 영상으로 교회 설립 12년의 역사를 되돌아 보는 순서가 있었다. 스크린을 통하여, 담임 목사님께서 자신의 목숨을 위협받을 만큼 깊은 상처를 입으셨음에도 불구하고 휠체어에 앉으신 채 주일 대예배 설교을 하시는 모습과 2개월간의 기도원 성회를 인도하시는 모습이 생생히 비춰졌다. 그 영상 보고는 오빠가 목사님에 관하여 잘 알지도 못하면서 품었던 오해들이 일순간에 풀어지는 계기가 되었고, 목사님에 대하여 마음의 문을 활짝 연 오빠는 담임 목사님께서 오직 주님의 심정으로 전하시는 생명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게 되었다.

오빠는 자기가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부모님께서 고백을 했다. 그 해 여름, 부모님께서는 오빠와 함께 수원흰돌산기도원으로 가셔서 ´98년도 하기산상성회에 참석하셨다. 성회 둘째날, 어머니와 오빠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고 방언을 말하시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다. 마지막날에는 아버지께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시고 방언의 은사를 받으셨다.

´98 하기 산상성회에서 하나님의 뜨거운 은혜를 체험한 것은 부모님과 오빠만이 아니었다. 희주는 몇달 동안 밤을 지새우며 워십을 연습하여 성회 기간 중에 하나님께 최상의 영광을 올려 드렸다. 그리고 설교시간에 말씀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뜨겁게 기도하던 중에 하나님께서 “너의 질병이 모두 나았느니라”는 음성을 들려주셨던 것이다. 그 후로는 아무리 힘든 동작을 하고 무대를 뛰어다녀도 숨이 가빠서 숨을 몰아쉬는 일이 없었다고 했다. 희주의 간증을 들으신 부모님께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라며 희주의 가슴에 손을 얹어보셨다. 희주의 심장부위에 손을 대면 언제나 “걸걸” 하는 거친 숨소리와 함께 얹은 손이 부르르 떨릴 정도로 가슴이 뛰었는데 그런 증세가 완전히 사라진 것을 보시고 깜짝 놀라신 아버지께서는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예수 믿으면 병이 낫는다고 하더니 정말 우리 딸의 심장병이 나았으니 이제 진심으로 예수를 믿어야겠네!”하며 기뻐하셨다.

그 후로 아버지께서는 예배 때마다 빠지지 않고 참석하셔서 은혜를 받으신다. 교회에서 예배 드리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뵐 때마다 정말 감사할 뿐이다. 아직 사업실패로 물질문제가 다 해결되지 않은 상태이지만 예전처럼 술로 잠을 청하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도움을 구하시게 되셨다. 아직은 믿음이 연약하시지만 말씀을 사모하시니 곧 믿음의 반석에 견고히 서실 것을 믿는다. 어머니께서도 10년 이상 위장병과 만성 두통으로 고생을 하셨는데 예배 때마다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들으시고는 언제 나았는지 모르게 다 나으셨다. 그리고 허리 디스크로 인해 5분 거리도 안되는 시장에 가려면 세 번 이상 길에 앉아서 쉬어야만 하셨으나, 지금은 너무나 많이 좋아지셨다. 아버지의 사업 때문에 흘리던 눈물은 이제 기도가 되어 하나님 아버지께 아뢰게 되었고, 생활에는 기쁨과 활력이 넘치신다. 아직 남동생 준규가 주님을 영접하지 않았지만 우리 가족이 믿음으로 똘똘 뭉쳐 기도하고 있기에 머지않아 곧 주님을 영접하게 될 것이라 믿는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16:31) 내가 예수님을 믿은 지 6년만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이루어 주신 주님께 진정으로 감사를 드린다. 내가 희정이를 통해서 연세중앙교회를 소개받지 않았더라면,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려고 자신의 생애를 아낌없이 다 바쳐 목회 하시는 윤석전 담임 목사님과 사모님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내가 어찌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공로로 구원받을 수 있었으며, 가족 구원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여 오늘날 이렇게 가족을 구원하여 영원한 행복을 함께 누릴 수 있으랴!

위 글은 교회신문 <13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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