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는 윤리 도덕이 아니라 생명입니다

등록날짜 [ 2004-06-17 11:06:25 ]

“기독교는 윤리 도덕만이 아니라 생명입니다” 1993년 3월 28일 주일 낮예배, 담임 목사님의 설교 말씀은 오랜 불신 생활에 지치고 지친 나에게 충격적인 말이었다. 그때 나는 마음 속에서 외치고 있었다. ‘내가 그토록 찾던 해답이 바로 이것이구나!’ 라고.

기독교의 평안은 고뇌할 수 있는 인간의 특권을 포기한 대가라고 생각해

어릴 때는 복음을 접할 기회를 거의 갖지 못했었다. 대학에 와서는 학내의 여러 기독교 선교단체 덕택에 복음을 접하게 되었지만 나는 거부하고 있었다. 왜냐 하면, 역사를 볼 때 기독교 교리는 사람들에 의해 보충되어 왔다는 생각이 들었고 성경이 온전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주장도 수긍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당시 대학가를 지배하던 유물론의 영향으로 기독교인들의 믿음도 여러 종교 현상 중의 하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내게 전도하는 사람들이 만면에 웃음을 띠고 있는 것을 바라보면서 ‘분명히 이 사람들에게는 무엇인가가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은 고뇌할 수 있는 인간의 특권을 포기한 대가로 얻은 평안일 것이다’ 라는 생각을 했다.

화려한 서론에 매료되어 찾아간 철학자나 문학가의 집은 텅 비어 있었고

어린 시절부터 항상 진리를 알고 싶었고 가장 인간적인 삶, 내가 살아야 할 이유를 찾으려 고민하였기에 ‘항공우주학과’라는 전공을 택했고, 많은 책들을 통해 우주의 원리와 인생의 진리를 찾아보려 노력하였다. 기숙사에 틀어박혀서 책만 붙들고 지낼 때가 많았다. 하지만 아무리 읽어도 진리는 찾을 수 없었고 오히려 갈증만 더해 갈 뿐이었다. 위대한 작가의 글을 읽으며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지만 뚜렷한 결론이 없는 결말에 오히려 갈림길만 많아지는 형국이었다. 모두 일반성을 갖기에는 부족한 것들이었고 나를 만족시키지 못하였다. 상대주의의 안개 속에서 무지개를 찾아다니는 것처럼 화려한 서론에 매료되어 찾아간 철학자나 문학가의 집은 텅 비어 있었다. 그저 주관적이고 사변적인 말들만이...

자유롭고 싶었지만 결코 자유로와질 수 없는 삶의 한계

해답을 찾는 일에 서서히 지쳐가는 가운데 인간적인 한계를 인정해야만 했다. 최상의 인간적 가치는 ‘사랑’이 아닐까 하는 어렴풋한 생각을 하기도 했다. 수많은 사람들의 발걸음으로 오솔길이 생기지만 거기에서 그 사람들의 발자국을 찾을 수는 없는 것처럼, 나도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이 세계와 역사의 작은 부분을 성실히 담당하면 되는 것이지 더 욕심을 내어 영원히 살아보려 하지는 않겠다고 호기를 부리기도 했다. 결벽에 가까울 만큼 나 자신에게 철저하다 보니 너무도 피곤한 삶이었고 그만큼 사람들에게서 받는 상처도 많았다. 그러다 서서히 삶이란 그냥 그럭저럭 살아가는 것뿐이라고 체념하게 되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이런 고민들도 몇 년만 지나면 그저 젊은 시절 한 때의 치기 정도로만 치부될 뿐일 텐데.... 자유롭고 싶지만 결코 자유로와질 수 없는 삶의 한계를 절실히 느끼기 시작하였고 언젠가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점점 강하게 들었다. 그러나 얄팍한 자존심 때문에 미루고 있었고 내가 하나님과의 싸움에서 패배했다는 생각으로 더욱 마음을 강팍하게 했다. 점점 진리에 대한 체념과 정신적인 타락이 가속화 되었고 학교에서 부딪히는 많은 전도자들을 피해다녔다.

오빠의 영혼이 지금 울부짖고 있다고 생각해!

그러다가 여동생이 연세중앙교회에 다니면서 밤늦게까지 기도하더니 나에게 전도의 말문을 열어보려고 노력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나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것도. 불면증에 시달리는 시간 속에서 내 영혼이 매우 곤고하다는 것을 느꼈고 동생의 기도가 내게 와 닿는 듯한 느낌을 가질 때가 있었다. 참으로 표현하기 힘든 느낌이었다. 그렇지만 아침이 되면 내가 너무 나약해졌구나 하고 생각하곤 했다. 그러다가 동생과 말다툼을 하게 되었을 때 동생이 불쑥 이런 말을 내던졌다.
“오빠의 영혼이 지금 울부짖고 있다고 생각해!”
우선은 불쾌했지만 마음 속에서는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애써 잊으려고 했지만 뇌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나를 전도하기 위해 여동생과 함께 온 한 자매는 이런 말을 했다. “제가 보기에는 형제님이 큰 짐을 지고 계신 것 같아요.” 그 당시에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서 밤11시가 넘어서야 도서관에서 돌아오는 시계추 같은 생활을 하고 있었고 불확실한 미래와 진로 문제로 몸과 마음이 극도로 지쳐 있었다. ‘그렇구나 내가 너무나 무거운 인생의 짐을 지고 있구나.’ 그 말에 못 이기는 척 교회 나가겠다고 승낙을 했다.

누가 영원한 생명의 가치를 부인하고 이데올로기를 택할 것인가?

이런 마음의 방황 때문이었을까, 첫예배 때 담임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 생명으로 들려온 그 말씀은 나를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기독교는 윤리 도덕만이 아니라 생명입니다.” 마른 영혼에 샘물이 부어지듯 그것은 어떤 논리나 분석을 뛰어넘어 내 가슴을 뒤흔들었다. 애써 놀라움과 기쁨을 감추려 했지만 내 마음 속에서는 ‘진리를 찾았다, 내가 안식할 곳을 찾았다!’ 하고 외치고 있었다. 고상한 철학, 드높이 휘날리던 인간적 가치들은 예수님이 주신 영원한 생명 앞에서는 안개와도 같이 스러지는 실체도 없는 것들이었다. 누가 이 영원한 생명의 가치를 부인하고 이데올로기를 택할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그렇게도 주시길 원하셨던 그 영원한 생명을 바라는 것을 누가 저급한 인간 욕망의 발로라고 매도할 것인가?
통성기도 시간이 되자 전에는 자존심 상해서 하기 싫었던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고백을 하였고, 턱은 굳어지고 혀는 이상하게 움직이려 하고 있었다. ‘이것이 방언이라는 것이구나!’ 하나님은 나를 너무도 잘 알고 계신 분이었다. 내가 구원을 받은 이후에도 도마처럼 끊임없이 회의하며 따지고 들 것을 아시고 내게 확실한 표적을 주신 것이었다.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가진 축복된 삶

그렇게 구원받고 난 후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사모하게 하시고 틈나는 대로 작은 성경을 펼치게 하셨다. 그 속에 내가 품었던 의문에 대한 모든 해답이 있었다. 그리고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서도 하나님께서는 복음과 하늘나라의 비밀을 하나씩 알게 하셨다. 내게 새로운 세계가 열리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넘어선 그 이면(裏面)!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 질서 속에 움직이는 웅대한 영적인 세계! 잘 알지는 못하였지만 그 벅찬 느낌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예수를 믿게 된 이후로 나의 세계관과 인생관은 완전히 바뀌었다. 삶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가 사라지고 뚜렷한 목표가 생겼다. 하나님께서는 높은 산 위에서 바라보는 것과 같이 인생을 조망할 수 있는, 영혼의 때를 바라볼 수 있는 시야를 주셨던 것이다. 기껏해야 50년 앞을 예측하고 세우던 인생 계획을 이제는 무한대의 영원을 바라보며 세우게 하셨다. 인간적인 한계에 갇혀 아웅다웅 살아가는 것이 아닌, 천국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 권세를 가진 축복된 삶을 살게 하셨던 것이다.

사법 시험에 도전

대학 졸업반이라 할 일도 많았고 아르바이트까지 하면서 모든 예배와 각종 모임에 참석하려니 공부할 시간이 너무 부족하기도 하고 힘도 들었지만 그래도 감사했다. 그리고 사회 생활을 하며 어떻게 신앙을 지킬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먹고 살기 위한 방편으로서의 직업을 찾기보다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무언가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어서 사법시험에 도전하게 되었다. 아르바이트를 해가며 거의 독학을 하다시피 했지만 피곤한 몸에 비해 마음은 너무도 평안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인지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최선의 노력을 다해보고 안되더라도 ‘그리 아니하실 지라도 감사해요’하는 마음으로 임하니 괴로움도 없고 슬럼프에 빠져 본 적도 없었다.
학교 도서관에서 밤늦게까지 공부하고 나서 피곤을 이기고 금요철야예배에 참석해 찬송을 하다보면 어느새 피곤함이나 감기는 흔적도 없이 사라질 때가 많았다. 처음 1년간은 금요일 밤을 새워가며 편집실원들과 같이 청년회 주보를 편집하여 오전에 아르바이트 가는 길에 인쇄를 맡겼다가 저녁에 찾아오곤 하였다. 이렇게 공부해서 언제나 합격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지만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하신 말씀을 의지하고 위로를 받곤 하였다.

하나님께서 열어주신 합격의 문

오랫동안 책상에 구부리고 앉아 공부한 까닭에 목과 등에 통증이 생기고 책을 보기가 힘들 정도로 괴로웠지만 1998년 송구영신 예배에서 찬송을 부르던 중 깨끗이 나았다. 공부를 방해하는 어려운 환경과 여건을 모두 이기고 평안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이와 같은 주님의 은혜와 관심 때문이었다. 한밤중에 자다 깨어 감사의 눈물을 주르르 흘릴 때도 많았다. 2차 시험을 치르면서 한 과목 한 과목 답안작성을 끝낼 때마다 감사의 눈물을 글썽이지 않을 수 없었다. 답안지를 붙들고 씨름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저들이 무엇을 위해 저렇게 인생을 바쳐가며 고생하고 있는가, 예수를 믿지 않는 저들은 영생을 알지도 못하고 오직 합격의 영광을 위해서 저렇게 애쓰고 있는데 나는 얼마나 행복한가. 시험에 떨어져도 감사하리라 ...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합격의 문을 열어 주셨다.

멸망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는 불쌍한 영혼들에게로

사법연수원에 들어 온 지도 벌써 2년이 되어간다. 떠들썩한 회식 자리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나는 마음 속으로 찬송을 부를 때가 많다. 동기 연수생들과 같이 앉아 얘기하고 웃기도 하지만 그들과 나는 다른 공기를 마시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무얼 하길 원하셔서 이곳으로 보내셨을까? 시험 치러 가던 날 새벽에 꿈으로 보여 주신 고통당하는 수많은 사람들. 하나님을 모르는 비참한 인생 속에서 나름대로의 가치관을 세우고 열심히 살아가려 하나 진리를 깨닫지 못한 채 멸망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 자신의 삶이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애써 외면하며 그 불안감을 봉쇄하기 위해 만들어낸 아집의 삶을 살다가 생을 마감할 그 불쌍한 영혼들에게 가라고 하시는 것이 아닐까.

위 글은 교회신문 <16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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