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난 예수로 너무 행복해요

등록날짜 [ 2006-01-06 14:47:52 ]

관절통으로 마비가 오면 쇼크 상태에 빠져 응급실로
39세 땐 썩은 고관절을 잘라내고 인공관절로 교체해


올해 55세인 나는 아들의 전도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기 전까지 무려 25년을 신경쇄약증과 관절염으로 고통 받았다. 절망과 좌절의 어두운 터널을 빠져 나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해방된 지금, 나는 산다는 것이 너무나 행복하다.

두려움
20세에 결혼해서 이듬해 아들을 낳고 단란한 행복을 누리던 우리 가정에 어느날 불행의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잠수부로 일하던 시숙이 몇년 전 시동생과 똑같은 사고로 바다에서 싸늘한 주검으로 변한 것이었다. 이 일로 남편은 극심한 공황증(恐慌症)에 시달렸다. 남편은 잠수 일을 마치면 늘 술을 마셨고, 집에 오면 인사불성인 채로 내게 거친 주먹을 휘둘렀다. 아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갈 때쯤 남편이 중동 건설현장으로 취업을 나가면서 가정에 평화가 찾아온 듯 했다. 하지만 3~4년간 계속된 남편의 거친 행동으로 인해 나는 수개월씩 정신과 치료를 받았다. 그러나 회복은 커녕 심한 신경쇄약증, 대인기피증, 두려움증으로 고통의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설상가상으로 30세부터는 온몸의 관절이 쑤시고 저리는 관절염까지 찾아왔다. 우측 무릎의 관절통은 심각했다. 한번 통증이 시작되면 다리 전체가 뻣뻣하게 마비되면서 쇼크상태에 빠졌고, 어린 아들의 울음소리를 뒤로 한 채 응급실로 실려가 몇개월씩 입원해 있곤 했다.

죽음의 문턱을 넘어
친정어머니는 나의 병을 고쳐보겠다고 자주 굿을 했다. 한번에 수백만원씩 하는 굿에다가 수시로 입원비를 마련해야해서 남편이 피땀 흘려 번 돈으로 장만한 집을 팔아야 했다. 시누이들은 이혼하라고 야단이었지만 남편은 나를 버리지 않고 돌봐주었다. 남편도 불쌍하고 아들도 불쌍했다. 한창 나이에 너무나 못 먹고 고통 속에 사는 나 자신도 불쌍했다. 급기야 아무도 없는 틈에 쥐약을 사서 병째 마셨다. 죽음의 문턱을 막 넘어서려는 순간, 속이 울렁거리면서 멀건 액체들을 똥물까지 다 토해냈다.
죽지 못해 10년을 더 그 지긋지긋한 고통 속에 살고나니까 우측 고관절(엉덩이)이 썩어들어갔다. 나이 서른아홉 살에 썩은 고관절을 잘라내고 쇠 관절을 박아 넣었고, 6년 후에는 그 쇠관절이 닳아서 교체해야했다. 지금 우측 다리를 약간씩 저는 것은 2차 수술 이후로 닳은 쇠관절을 교체하지 않아서 그런 것이다.

아들 따라 처음 교회에
25년간 병치레만 하다 50줄에 들어서자 눈을 감아도 떠도 헛것이 보였다. 방안 가득 온통 구더기며 벌레가 우글거렸다. 돌아가신 시숙도 자주 꿈에 보였다. 어지러운 마음을 달래려고 매일 눈만 뜨면 절에 갔다.
그 무렵, 아들은 군 제대 후부터 다니기 시작한 교회에 열심이었다.

“흰돌산수양관 성회 때, 앉은뱅이 할머니가 하나님 말씀을 듣다가 벌떡 일어나 걸어다녔다니까요. 제 눈으로 똑똑히 봤어요. 어머니도 하나님 믿으면 병도 고치고 천국도 갈 수 있어요. 저랑 같이 교회 다녀요!”

어미 때문에 고생을 많이 하고 자란 속 깊은 아들이라 그의 말이라면 다 들어주고 싶은데 교회 문제만큼은 그렇지가 않았다. 하나뿐인 자식이 눈물까지 흘려가며 전도를 했지만 웬일인지 하나님이니, 예수님이니 하는 말만 들으면 화가 치밀었다. 아들이 밥상 앞에서 기도를 하면 멱살을 잡아 뜯어놓기도 하고, 하나님과 부모 중 누가 더 좋으냐고 따지다가 집에 못 들어 오게 쫓아내기도 했다. 부모가 불쌍하다며 울고 기도해서 늘 눈이 퉁퉁 부어 다니는 꼴도 못마땅했다.
아들을 핍박한 지 3년째 되던 어느 날, 아들이 죽을 쒀달라고 했다. 지금 생각하니 병든 어미를 위해 금식을 한 모양이지만 당시엔 전혀 몰랐다. 그런데 아들 금식 후, 내 마음에 변화가 일어났다. 교회에 한번 가보고픈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50 평생 처음 교회에 간 날, 아들은 자리에 앉자마자 눈물콧물 범벅이 되도록 울었다.

하나님 저 꼭 만나주세요
교회에 다닌 지 두 달 후 흰돌산수양관 성회에 참석했다. 하나님을 꼭 만날 작정으로 난생처음 삼일금식까지 했다. 몸이 성치 않은 사람이 금식을 하니 졸려서 둘째 날 저녁까지 강사 목사님의 얼굴 한번 보지 못했다.
셋째 날 아침, 이상하게도 힘이 나서 새벽부터 세수를 하고 초신자인 내가 한 시간이나 기도를 했다.

"하나님, 저를 꼭 만나주세요. 오늘 만나주지 않으면 저 여기서 안 내려가요. 저 30년 동안 병들어 산 것 너무 억울해요."

그때부터 윤석전 목사님의 얼굴이 환하게 보이고 설교말씀이 귀에 쏙쏙 들어와서 은혜를 받았다. 통성기도 시간에는 회개가 터져 나왔다. 교회에 등록한 후에도 두 달이나 절에 다닌 죄, 남을 욕한 죄, 아들을 모질게 핍박했던 죄들을 회개하는 순간, 눈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지더니 가슴이 말할 수 없이 시원해졌다. ‘아, 정말 하나님이 살아계시나!’하는 생각에 죽기 살기로 하나님께 매달렸다.
“하나님 아버지! 저 30년간 병들어 살았어요. 제발 병을 고쳐주세요. 오직 아버지만 의지하고 살게요. 충성하면서 살 거예요. 제발 저 고쳐주세요!”
어릴 때 돌아가셔서 불러본 기억이 아련한 아버지란 이름! 내게도 아버지라 부를 분이 있다는 것이 너무 좋아서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께 얼마나 간절히 매달려 기도했는지 모른다.

놀라운 치유의 역사가
성회에 다녀온 후 며칠지나지 않아서였다. 언제나처럼 너댓가지나 되는 알약을 먹으려는데 마음속에서 ‘약을 버리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약을 버리라고?’ 의아해했지만 마음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순종해서 약을 쓰레기통에 넣었다. 며칠 후, 관절 마디마디가 퉁퉁 부어올라 벌겋게 됐지만 약을 먹는 대신 기도를 했더니 이상하게도 아픈 곳이 나았다.
한번은 흰돌산 수양관에서 침례식을 한다고 해서 문답서를 쓰고 준비하고 있는데, 하루 전날 갑자기 관절이 퉁퉁 부어오르고 설사와 구토를 해댔다. 도저히 못받겠다고 했더니,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연합하는 침례는 꼭 받아야 한다고 구역장이 말했다.
다음 날 집에까지 찾아와서 침례 받으러 가자는 통에 하는 수 없이 따라나섰다. 신기하게도 구역장의 차에 타자마자 곧 죽을 것같던 관절통이 가라앉았다. 침례를 받고 나오는데 온몸의 통증이 씻은 듯 사라지고 너무너무 기분이 좋았다. 집에 올 때는 콧노래를 불러가며 왔다. 정말 신기한 일이었다.
며칠 후, 또 한 차례 시험이 왔다. 온 몸의 관절이 퉁퉁 부어오르고 피부색마저 벌겋게 변했다.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고 약까지 받아왔다. 그런데 막상 약을 보니 또 먹기 싫은 마음이 들었다. 분명 하나님이 치료해 주셨는데 다시 약을 먹으면 더 심해질 것만 같았다. 약을 버리고 다시 아버지께 기도를 했다.
“아버지! 제 병 다 고쳐주셨잖아요. 다시는 아프지 않게 해주세요.”
간절히 기도를 하고 나자 그 자리에서 관절의 통증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때가 2001년 1월이었으니까 어느새 만 5년이 지났다. 그러나 나는 지금까지 단 한번도 약을 먹거나 병원을 찾은 적이 없다. 아버지께서 기도할 때마다 하나하나 모든 병을 다 치료해주셨기 때문이다. 20년 된 지긋지긋한 관절염이며, 바늘로 콕콕 찌르던 속앓이병, 무엇만 먹으면 늘 토하던 증상, 심장이 두근거리고 뒷골을 잡아당기는 병 등 모두 다 씻은 듯 깨끗이 고쳐주셨다. 나뿐만 아니라 남편도 관절에 물이 생겨 늘 병원에 가서 빼내곤 했는데 하나님께 기도할 때 고쳐주셨다.

은혜에 감사하며 충성할 뿐
나는 인천에 살지만 몇 년째 매일 교회에 와서 철야기도하고 다음날은 성전복도를 청소한다. 수양관에서 동·하계성회가 열리면 성회마다 상주하면서 충성한다. 생각할수록 하나님 우리 아버지가 너무나 고맙고 감사하다. 하나님을 만나게 해주신 목사님, 그리고 사모님을 뵐 때마다 가슴이 저리도록 감사할 뿐이다.
나는 동·하계성회가 너무나 좋다. 나처럼 하나님을 몰라 무서운 질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 힘들고 무거운 짐 진 사람들 이 다 와서 우리 목사님 설교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만나 나처럼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오늘도 나는 기도한다. 우리 목사님 사모님, 귀한 일 더 많이 하실수 있도록 영육간에 강건함 달라고!

위 글은 교회신문 <80호> 기사입니다.


    아이디 로그인

    아이디 회원가입을 하시겠습니까?
    회원가입 바로가기

    아이디/비번 찾기

    소셜 로그인

    연세광장

    더 보기